[강석기의 과학카페] 파란빛의 두 얼굴

2017년 11월 14일 13:10

책(과학에세이집)을 몇 권 내다보니 가끔 대중강연 요청이 들어온다. 워낙 말주변이 없어서인지 청중들이 지루해하는 모습을 본 뒤에는 되도록 안 하려고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거듭 부탁하면 거절할 명분이 없어 하게 된다. 필자는 특정 분야 전문가가 아니다보니 보통 ‘일상의 과학’이라는 제목으로 에세이 몇 편을 풀어 설명한다.


부담 없는 제목에 재미를 기대하고 왔다가 복잡한 내용을 딱딱하게 설명하는 강의에 지쳐서인지 질의응답 시간에 질문이 없어 썰렁하고 어색하게 끝나는 경우가 보통인데 한 번은 한 분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꽤 당황한 기억이 난다.

 

2005년 일본 나라현에서는 파란빛 가로등을 도입해 범죄율을 30%나 줄이는 효과를 거뒀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파란빛 가로등을 시범 설치하는 지차체가 있다. - weburbanist.com 제공
2005년 일본 나라현에서는 파란빛 가로등을 도입해 범죄율을 30%나 줄이는 효과를 거뒀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파란빛 가로등을 시범 설치하는 지차체가 있다. - weburbanist.com 제공

수면 방해 vs 범죄예방


제3의 빛수용체로 불리는 멜라놉신(melanopsin)의 발견과 그 의미에 관한 내용이었다. 망막의 신경절세포 일부(약 2%)에 존재하는 멜라놉신은 빛에 반응해 뇌에서 일주리듬을 주관하는 시교차상핵(SCN)으로 신호를 보낸다. 즉 뇌는 멜라놉신을 통해 낮과 밤의 정보를 얻고 이에 따라 생체시계가 시간을 맞춘다는 말이다.


그런데 멜라놉신은 파장이 480나노미터인 파란빛에 가장 민감하다. 따라서 밤에 파란빛이 많이 나오는 조명이나 전자기기를 쓰면 시교차상핵이 아직 낮이라고 판단해 잠들 채비를 하지 않고 그 결과 수면장애를 겪을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밤늦게까지 뭔가를 봐야 하는 사람은 되도록 파란빛의 비율이 낮은 조명을 쓰는 게 좋을 거라고 얘기했다. (그 뒤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에 파란빛을 줄인 ‘보기 편한 모드’가 적용되는 걸 보고 반가웠다.)


덧붙여 거리조명의 경우도 나트륨등(노란빛) 대신 LED 백색등을 쓰는 건 에너지 측면에서는 친환경이지만 생태학의 관점에서는 동식물의 생체시계를 교란시켜 문제가 많으므로 청색LED를 줄이거나 없앤, 즉 녹색LED와 빨간색LED 위주로 된 가로등을 써야 한다고(물론 밝은 빛이 필요한 찻길은 백색등을 써야겠지만) 제안했다.


그런데 한 청중이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일본의 한 도시에서는 오히려 파란빛이 나오는 가로등을 설치해 범죄율을 크게 낮췄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만일 필자의 말대로 파란빛을 줄이거나 없앤 가로등을 설치하면 백색등일 때보다도 범죄율이 더 올라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뜻밖의 질문에 당황한 필자는 “파란빛이 범죄율을 낮춘다는 건 처음 듣는 얘기”라고 답하며 말을 흐렸다. 집에 와서 검색해보니 정말 일본 나라현에서 “파란색이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다”며 2005년 파란빛 가로등을 도입했고 그 결과 범죄가 연간 3만2000여 건에서 2만1000여 건으로 크게 감소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몇몇 지자체에서도 시범적으로 파란빛 가로등을 설치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녹색이나 파란색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빨간색이 흥분시킨다는 건 색체심리에서 상식적인 얘기다. 투우사들이 붉은 천을 흔드는 건 소뿐 아니라 관중들도 흥분시키는 행위다. 즉 색맹인 소는 천의 색이 아니라 흔들림에 흥분하는 것이고 사람들은 천의 붉은색에 심장이 더 두근거린다. 그렇다면 이런 파란빛의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스트레스를 받는 테스트를 받은 참가자가 파란빛 조명이 있는 방에서 쉬고 있다. 파란빛이 있는 방에서 쉬면 백색 조명이 있는 방에서 쉴 때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으로 밝혀졌다. - 그라나다대 제공
스트레스를 받는 테스트를 받은 참가자가 파란빛 조명이 있는 방에서 쉬고 있다. 파란빛이 있는 방에서 쉬면 백색 조명이 있는 방에서 쉴 때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으로 밝혀졌다. - 그라나다대 제공

스트레스 1분 만에 해소


학술지 ‘플로스원’ 10월 19일자에는 파란빛이 스트레스를 이완시키는데 있어서 백색광보다 효과가 훨씬 빠르다는 연구결과를 담은 논문이 실렸다. 즉 파란빛 가로등과 일맥상통하는 얘기다.


스페인 그라나다대의 연구자들은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들을 백색광이 있는 방과 청색광이 있는 방에서 쉬게 할 때 어느 쪽이 스트레스가 빨리 해소되는지 ‘측정’했다. 즉 단순히 ‘마음이 얼마나 편해졌냐?’ 같은 심리적인 평가뿐 아니라 뇌파를 측정해 뇌의 이완상태를 객관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참가자들은 6분 동안 MIST를 수행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MIST는 몬트리올영상스트레스과제의 약자로, 주어진 문제를 제한된 시간 내 풀게 하며 시간이 지나가는 걸 표시하고 제때 풀었는지 맞았는지 틀렸는지에 대해 수시로 알려준다. 계속해서 이런 문제들을 풀다보면 참가자들의 스트레스가 올라가기 마련이다. 6분간 진을 뺀 참가자들은 두 그룹으로 나눠 한 쪽은 파란빛이 가득한 방에, 다른 쪽은 평범한 백색광이 있는 방에서 10분 동안 휴식을 취하고 나서 방을 바꿔 다시 10분 동안 쉰다.


참가자들의 스트레스 정도는 ‘전전두엽의 상대적인 감마(prefrontal relative gamma)’라는 뇌파 패턴으로 측정한다. 상대적인 감마(이하 RG)란 파장이 4~7헤르츠인 세타파와 8~13헤르츠인 알파파의 합에 대한 25~45헤르츠인 감마파 세기의 비율이다. 흥미롭게도 전전두엽의 RG가 스트레스 지표라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수록 RG가 크게 나온다.


테스트를 시작할 때 참가자들의 RG는 0.5 수준이었는데(아무래도 긴장으로 약간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6분 동안 MIST를 수행한 뒤에는 거의 1에 가깝게 치솟았다. 그 뒤 청색광 조명 방에서 휴식을 취한 그룹(G1)은 평균 1.1분 뒤에 RG가 최저 수준(0에 가까워 짐)에 이르렀다. 반면 백색광 조명 방에서 쉰 그룹(G2)은 평균 3.5분 뒤에야 RG가 최저 수준(0.1)에 도달했다. 


그 뒤 G1의 RG가 조금 올라갔고 G2의 RG도 살짝 올라가 3.5분에서 5분 사이 RG가 0.2 수준에서 수렴했고 그 뒤 둘 다 조금씩 올라가 10분 뒤에는 0.3 부근이었다. 다음으로 방을 바꿔 10분 간 있었는데, 두 그룹의 RG는 큰 차이 없이 0.2~0.3 수준에 머물렀다. 즉 스트레스를 받은 직후 파란빛이 있는 공간에 머물 경우 스트레스가 급격히 완화된다는 말이다. 실제 설문조사에서도 참가자들의 83%가 파란빛이 백색광에 비해 훨씬 더 마음을 편하게 한다고 답했다.


연구자들은 첫 방에서 5분 정도 지난 뒤 두 그룹 모두 RG값이 약간 커지는 현상에 대해서 참가자들이 상황에 적응하면서 지루함을 느껴 스트레스 수준이 약간 올라간 것 같다고 추측했다. 즉 파란빛은 스트레스 직후 몇 분 동안만 강한 이완효과가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는 매우 중요한 현상으로 보이는데, 순간적인 화나 충동을 억누르지 못해 싸움이나 자살, 범죄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파란빛 조명이 범죄율을 3분의 1이나 줄인 것도 이런 효과 때문이 아닐까.

 

빛의 스트레스 이완 효과를 실험하는 동안 참가자의 뇌파를 측정해 얻은 ‘전전두엽의 상대적인 감마(RG)’의 변화를 보여주는 그래프다. RG는 스트레스 정도를 보여주는 지표로, 수치가 높을수록 스트레스가 크다는 뜻이다. 참가자들은 처음 6분 동안 문제풀이를 하면서 RG가 올라가는데 먼저 파란빛 방에서 휴식을 취한 그룹(G1. 파란선)이 백색광 방에서 쉰 그룹(G2. 검은선)에 비해 급격히 RG가 떨어짐을 알 수 있다(7분 지점). 위는 원 데이터이고 아래는 이를 분석한 그래프다. 자세한 내용은 본문참조. - 플로스 원 제공
빛의 스트레스 이완 효과를 실험하는 동안 참가자의 뇌파를 측정해 얻은 ‘전전두엽의 상대적인 감마(RG)’의 변화를 보여주는 그래프다. RG는 스트레스 정도를 보여주는 지표로, 수치가 높을수록 스트레스가 크다는 뜻이다. 참가자들은 처음 6분 동안 문제풀이를 하면서 RG가 올라가는데 먼저 파란빛 방에서 휴식을 취한 그룹(G1. 파란선)이 백색광 방에서 쉰 그룹(G2. 검은선)에 비해 급격히 RG가 떨어짐을 알 수 있다(7분 지점). 위는 원 데이터이고 아래는 이를 분석한 그래프다. 자세한 내용은 본문참조. - 플로스 원 제공

수면에 미치는 영향은 심리적 측면 아냐


흥미롭게도 연구자들 역시 논문 말미에서 파란빛의 모순을 언급하고 있다. 즉 수면호르몬인 멜라토닌의 분비를 억제하는 각성작용을 하면서도 이번 논문의 결과처럼 스트레스를 빠르게 이완시키는 진정효과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에 미치는 색의 영향에 깔려있는 생리적, 심리적 메커니즘은 이번 연구의 범위를 넘어서는 주제”라며 빗겨나갔다. 뭔가 그럴듯한 설명을 기대했던 필자는 좀 실망했다.


연구자들은 휴식 공간의 조명으로 LED를 사용했는데, 백색광은 세 가지 LED를 다 켠 상태이고 파란빛의 경우 녹색LED와 빨간색LED를 껐다. 즉 파란빛 방은 백색광 방에 비해 조도가 낮은 것이다. 따라서 두 방의 스트레스 이완 속도 차이가 빛의 색이 아니라 세기 때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누군가가 주장해도 “100% 그렇지 않다”고 반박할 수 없을 것 같다. 연구자들이 녹색빛 방과 빨간빛 방에서 비교 실험을 하지 않은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그런데 문득 파란빛의 모순을 설명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즉 파란빛의 수면각성주기에 대한 효과는 생리적 (또는 무의식적) 차원의 작용이라면 스트레스 완화 효과는 심리적(또는 의식적) 차원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즉 전자의 경우 파란빛을 내는 파장의 존재 유무가 중요한 반면 후자의 경우는 파란빛으로 보이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만일 앞의 두 방에서 수면에 미치는 영향을 측정해봤다면 백색광 조명 방이 청색광 조명 방보다 억제를 더하면 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백색광 방의 경우 멜라놉신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파란빛의 양은 똑 같고 여기에 녹색빛과 빨간빛이 더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반면 파란빛에 녹색빛과 빨간빛이 더해져 흰(무색)빛이 되면 파란빛이 그대로 있음에도 파란색의 심리적 효과는 사라진다.


멜라놉신은 쥐나 사람 같은 포유류뿐 아니라 개구리 같은 양서류에도 존재하는 빛수용체다. 즉 멜라놉신이 파란빛을 감지해 낮과 밤의 정보를 주는 메커니즘은 오래 전에 진화했다는 말이다. 반면 우리가 느끼는 색의 심리적 효과는 영장류가 3색형 색각(trichromacy), 즉 원추세포의 포톱신(photopsin)이 세 가지(각각 파랑, 녹색, 빨강 파장에 가장 민감)로 나뉜 이후에 진화했을 것이다.


문득 불교에서 명상 상태를 가리킬 때 쓰는 ‘성성적적’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성성적적(惺惺寂寂)이란 마음이 고요하면서도 의식이 맑게 깨어있는 상태를 말한다. 파란빛이 성성적적을 상징한다고 말하면 필자의 지나친 비약일까. 

 


※ 필자소개
강석기. 서울대 화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지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4권, 2012~2015),『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2014)가 있고, 옮긴 책으로 『반물질』(2013), 『가슴이야기』(201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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