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와 곳 29] 점집: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는 곳

2017년 11월 04일 17:00

마음이 힘든 시절일수록 사람들이 찾아가는 곳이 있다. 그들은 당사자이기도 하고 가족이기도 하다. 당사자의 마음이 힘들면 그를 사랑하는 가족의 마음의 생살도 아프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외따로 또는 함께 위안과 힘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향한다. 그곳은 앓는 마음을 치유하려고 찾아가는 정신건강의학과나 심리상담소이기도 하고,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는 프로 스포츠 경기장이기도 하고, 초월적 존재에 의지하려고 찾아가는 교회나 성당이나 절이기도 하고, 불안한 현재에 이어진 미지의 미래가 궁금해 방문하는 점집이기도 하다.

 

pixabay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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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점집을 가본 적이 없지만, 전혀 다른 공간에서 지인에게 소개 받은 점술가를 만난 적이 있다. 그곳은 중형 백화점에 위치한 개방된 커피숍이었는데 바로 옆에 영화관이 붙어 있었다. 조금 이르게 그 약속 장소에 도착해 주위를 둘러보면서 생각해보니 사람들의 인생사가 하고많은 영화 속 사연들과 유사하기도 할 테니 점집을 대신한 그 장소가 사람의 운명을 살피는 곳으로서는 꽤 상징적인 듯했다. 약속한 점술가를 만나본 적이 없어서 가만히 앉아 기다리면서도 몇 테이블 건너편에 노트북을 열어놓고 한 중년 여성과 마주 앉아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한 장년 여성이 점술가임을 나는 한눈에 알아차렸다. 잠시 후, 앞선 만남을 마친 그분이 간단한 짐을 챙겨 내게로 다가와 약속을 확인하고는 앞자리에 앉았다.


사주(四柱)의 근거 정보가 되는, 출생한 연월일시(年月日時)를 알리자 ‘만세력’으로 보이는 책자에서 무언가를 확인하고 (나중에 내게도 보여준) 노트북의 엑셀 파일 화면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점술가가 채 1분도 안 돼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달의 기운을 타고났어요. 해는 좋고 달은 나쁘다는 얘기가 아녜요.”


‘달’이라는 은유적인 표현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무엇을 암시하는 효과로 기능하는 은유(metaphor)는 그 의미를 가둬놓지 않기에 열린 수사법이다. 사주(四柱)라는 말 자체가 집의 지붕을 떠받치고 벽을 붙잡고 있는 네 기둥[柱]에 비유해 태어난 연월일시, 즉 네 간지(干支)의 조합에 따라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니, 은유에서 시작해 은유로 이어지는 점술가의 말에는 그럴듯한 품위가 있었다.


그렇듯 연월일시에 해당되는 간지(干支) 여덟 글자, 즉 팔자(八字)는 명리학(命理學)에 기초해 있기에 사주의 팔자는 어느 곳에서 보더라도 한결같지만 그 사주에 대한 점술가의 해설에 따라 풀이는 달라진다.


달의 사주인데 그 달이 한낮을 지나 두 해 전부터는 초저녁의 시간대에 들어와 있다며, 달은 한낮에는 존재감이 없어서 좋지 않은 시절이었지만 초저녁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밤으로, 밤에서 한밤으로 어둠이 깊어갈수록 (천운의 동행 여부와는 무관하게) 당사자의 운은 더욱 좋아질 거라고 점술가는 내게 말했다. 그 해설이 내게는, 달은 해의 기운보다는 역동적이지는 않지만 고요한 기운을 타고났기에 당사자는 타고난 체력은 약해도 생각과 감성이 섬세한 인물이라는 말로 들렸다.

 

GIB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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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에서 개선장군 맥베스를 비극으로 몰아간 것은 그가 장차 왕이 될 거라는 세 마녀의 예언에 대한 철석같은 믿음이었다. 그래서 문학평론가 테리 이글턴의 말마따나 이 작품의 주인공은 맥베스가 아니라 세 마녀라고 볼 수도 있다. 운명을 비극으로 바꿔놓은 것은 예언이었고 그 예언은 길에서 만난 세 마녀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맥베스가 예언을 믿지 않았다면 그런 비극은 없었을 것이고 그 예언 때문에 욕망이 들끓지도, 불안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맥베스가 왕은 되지만 자식에게 세습되지 못한다는 세 마녀의 예언은 종래에는 비극의 낚싯줄이 드리워져 있음을 암시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걸림돌은 제거하면 된다는 (운명을 거스르는) 생각에 맥베스 부부는 그 미끼를 덥석 문 셈이다. 믿고 싶은 예언만 믿었던 것이다.


같은 어머니 배 속에서 같은 시간에 태어난 쌍둥이의 사주는 같아도 쌍둥이 개인의 인생은 다르게 전개된다. 이런 지적에 혹자는, 사람은 살아가면서 사회적 관계 맺음이 제각각이어서 서로 영향을 끼치므로 인생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반박하겠다. 그래서 어쩌면 “사주는 못 고쳐도 팔자는 고칠 수 있다”는 옛말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명리학의 역사가 3000 년이고 그동안 데이터가 축적돼왔으니 그것을 일종의 통계학이라고 평가하는 입장도 있다. 그대로 받아들여 한 사람의 사주에서 그의 타고난 기질을 엿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최근 열렸던 2017 한국시리즈의 마지막 경기를 떠올려보자. 9회말에서 번트 하나가 수비수의 실책으로 만루까지 이어져 마지막 역전의 기회를 얻었지만, 2사 만루 상황에서 운명을 싣고 투수의 손끝에서 날아간 공 하나가 타자의 배트에서 수직으로 솟았다가 포수의 글러브에 들어가는 순간, 대미의 플레이오프 순위를 결정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니 아무리 용하다는 점집이 있더라도, 그곳을 찾아갔을 때 혹시라도 단정적으로 예언하는 점술가의 말을 듣게 된다면 그 점괘가 좋든 나쁘든 믿지 않아야 한다. 그 예언에 사로잡히는 순간 믿음에 지배당해 ‘맥베스’ 같은 비극이 시작될지도 모를 일이다. 오히려 내가 생각하는 수준급 점술가는 백화점 커피숍의 점술가처럼, 사주로 푼 기질적 경향만 은유적으로 말해주어 방문자가 스스로 희망의 길을 찾도록 유도해주는 역할자다. 점술의 순기능은 방문자의 답답한 현실을 위로하고 활로를 모색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운명을 믿어버리면 인간은 더 이상 실천할 게 없다. 그래도 운명이 있다면, 그것은 인류가 계속 진화해왔다는 것뿐이다.


 

※ 편집자 주

[마음을 치는 시(詩)]와 [생활의 시선]에 연이어 윤병무 시인의 [때와 곳]을 연재합니다. 연재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시간과 장소’에 초점을 맞춘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 ‘시간’은 오래되어 역사의 범주일 수도 있고, 개인 과거의 추억일 수도 있고, 당장 오늘일 수도 있고, 훗날의 미래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장소’는 우리가 생활하는 바로 ‘이곳’입니다. 그곳은 우리가 늘 일상의 공간에서 발 딛고 서 있는 희로애락이 출렁이는 삶의 현장입니다. 너무 익숙하거나 바빠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한 그 ‘곳’을 시인의 눈길과 마음의 손을 잡고 함께 가만히 동행해보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의 구체적인 현지와 생생한 감수성을 잠시나마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 필자 소개

윤병무. 시인. 시집으로 ‘5분의 추억’과  ‘고단’이 있으며, 동아사이언스 [생활의 시선]을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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