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영화] 배우 김주혁을 기리며, ‘홍반장’

2017년 11월 04일 11:00

# 영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


감독: 강석범
출연: 김주혁, 엄정화, 김가연
장르: 코미디, 드라마, 멜로/로맨스
상영시간: 1시간 48분
개봉: 2004년 3월 12일
관람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주)시네마서비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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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 김주혁을 기리며


배우 김주혁이 지난 30일(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영화계는 물론이고 각계각층에서 많은 이들의 추모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김주혁은 ‘스타’라고 부르기에는 무언가 어색함이 있는 배우였다. 데뷔 초에는 배우 故김무생의 아들이라는 꼬리표가 항상 따라다녔다. 작품마다 흥행을 보장하는 배우도, 각종 시상식에서 상을 휩쓸어 가는 배우도 아니었다. 작품의 결과를 놓고 보면 배우로서 아쉬울 법도 한데, 김주혁은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대신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캐릭터와 시나리오를 꼼꼼히 살피고, 캐릭터를 연구하고 연기해 착실하게 필모그래피를 채웠다. 2001년 ‘세이 예스’로 시작해 매년 1편 꼴로 영화를 개봉시킨 성실한 배우였다. 드라마에서도 ‘라이벌’, ‘프라하의 연인’, 그리고 최근작 ‘아르곤’에서도 안정감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최근 들어 김주혁은 더욱 인상적인 행보를 보여주었다. 영화만 해도 작년 세 편, 올해 두 편을 개봉시켰는데, 그 면면이 화려하다. 홍상수 감독의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이경미 감독의 문제작 ‘비밀은 없다’가 있고, 완성도는 아쉬웠지만 김주혁의 연기만큼은 좋은 평가가 잇따랐던 ‘공조’는 그에게 얼마 전 제1회 더 서울 어워즈 남우조연상을 안겼다. 인터뷰에서 “요즘 무슨 역을 해도 연기가 재밌다”고, “맡은 적 없는 인물을 연기하는 재미에 빠져 있다"고 즐거워하던 김주혁을 보고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는 표현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 영원한 ‘홍반장’
 

(주)시네마서비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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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그런 그를 ‘…홍반장’으로 기억한다. 그가 출연한 모든 영화를 보진 못했지만 어쩐지 기억 속에 각인된 그는 ‘홍반장’이다. ‘…홍반장’은 그가 처음으로 타이틀롤을 맡은 영화다. 사실 영화 데뷔작인 ‘세이 예스’나 인기를 모았던 ‘싱글즈’에서도 비중은 높았지만 선배들의 이름에 밀리거나 다른 동료들에게 주인공의 자리를 내주어야만 했다. 그런 그에게 첫 주연작 ‘…홍반장’은 더없이 뜻깊은 작품이었으리라.


‘…홍반장’ 속 홍반장(본명 홍도식, 김주혁 분)은 매력적인 것을 넘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다. 비정한 도시에서 도망쳐 한적한 마을로 떠밀려 온 주인공 혜진(엄정화 분)의 시선을 따라가면 마을의 ‘오지라퍼’ 홍반장은 짜증나지만 그래도 사람 냄새를 물씬 풍긴다. ‘짱가’의 주제곡 가사를 수식어로 붙인 26자의 긴 제목이 설명해 주듯, 홍반장은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나 문제를 해결하는 ‘맥가이버’형 인간이다.


번듯한 직장이 없고 후줄근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홍본장은 공인중개사 자격증 소유자인데다, 무면허이긴 하지만 인테리어 능력도 수준급이다. 편의점 알바, 중국집 및 분식집 배달, 택배 배송 등 일당 5만원 받으면 마다하는 일 없이 뚝딱 해낸다. 언제 배웠는지 골프도 잘 치고 바둑도 잘 둔다. 심지어 싸움까지 잘해서 마을의 정의의 사도를 자처한다. 가끔은 라이브 카페 가수의 땜빵까지도 한다. 발은 또 얼마나 넓은지 동네에서 홍반장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동네 갈매기와도 인사를 나누는 사이다. 한편으로는 책과 LP판을 수집하며 혼자 오래 살아서 요리도 잘하고 가끔은 분위기를 낼 줄도 안다. 사실상 현실에는 존재할 수가 없는 인물이다.

   

(주)시네마서비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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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반장은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일찍 떠나 보냈다. 마을 사람들은 머리를 모아 홍반장을 동네 쌀집 할아버지의 양아들로 들여 보내기로 했다. 덕분에 홍반장은 구김살 없고 선한 마음씨를 가진 청년으로 자란다. 영화는 차가운 도시와 대비되는 따뜻한 마을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그 중심에서 공동체를 이끄는 가장 상징적인 인물로 홍반장을 내세운다. 감독이 희미해지는 공동체 정신에 대한 향수를 홍반장이라는 캐릭터에 듬뿍 담은 것이다. 잘 나가는 회장님의 딸로 자란 치과의사 헤진은 자신과 정반대의 삶을 사는, 선하고 인간적인 홍반장을 사랑하고 점차 닮아간다.


‘…홍반장’이 제작되어 개봉하던 2003년, 2004년은 IMF 이후 청년 실업률이 최고로 치솟던 때였다. 20대 태반이 백수라는 뜻의 ‘이태백’이라는 말이 유행했고, 취업 경쟁률도 엄청나게 높았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이들은 홍반장처럼 자발적으로 취업을 포기하기도 했다. 사실 청년 문제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심각했다. 세계 최고의 교육열을 자랑하는 나라답게 그 어떤 세대보다 똑똑하고 능력 있는 인재들이 넘치지만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현실. 그 속에서 전문직, 공무원, 대기업 사원이 아니라면 번듯한 직장이 없다고 무시 받기 십상이다.


홍반장 캐릭터는 현실의 반영이다. 어느 누구보다 다재다능하지만 이렇다 할 직업은 없다. 하지만 그런 현실에서도 일당 5만원을 인간적인 삶의 최저 기준으로 삼아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인물이다. “한심하다”는 혜진의 말에 “내가 사는 게 어때서?”라고 반문할 만큼 자존감도 높다. 고달픈 현실에 맞서 엉뚱하지만 굳센 삶의 태도를 제시하는 캐릭터였다.


안타깝게도 ‘…홍반장’은 천만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폭발적인 흥행에 밀려, 개봉 당일 터진 故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에 밀려서 크게 흥행하진 못했다. 그렇지만 홍반장 역할로 김주혁은 적역이었다. 그가 연기를 무척이나 잘했다고 표현하는 것보다는, 캐릭터가 배우 김주혁의 인간적 매력과 조응했다고 보는 게 정확할 듯 싶다. 과거 인터뷰에서 김주혁은 “시나리오상의 홍반장은 딱 임창정”이었는데 왜 자신에게 역할이 돌아왔는지 모르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노력파인 그는 임창정과는 다른 자신만의 홍반장 캐릭터를 만들어냈고,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홍반장’은 그의 매력과 따뜻함과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주)시네마서비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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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뒤에 회자되는 생전 모습들을 마주하다 보면 왜 사람들이 이토록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는지 알 것 같다. 화려하진 않지만 작품 속에서 언제나 든든하게 제 몫을 다하고 노력하던 배우. 한 명의 영화 팬으로서 그의 이른 죽음이 진심으로 안타깝다. 누군가에게는 예능 ‘1박 2일’ 속 구탱이형으로, 누군가에겐 홍반장으로, 혹은 차기성으로, 종찬이나 성찬으로, ‘방자전’의 방자로, 지혁이나 상현을 연기했던 멋진 배우로, 유쾌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 필자 소개

이상헌. 영화를 혼자 보는 게 전혀 부끄럽지 않은 사람. 시간은 한정적이지만 좋은 영화를 보고 싶은 당신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인생은 짧고 볼 만한 영화는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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