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민의 돈테크무비] 거장은 ‘저주받은 걸작’을 꿈꾸는가?

2017년 11월 05일 11:00

결국 그렇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드니 빌뇌브 감독, 라이언 고슬링, 해리슨 포드 주연의 ‘블레이드 러너 2049’가 엄청난 광고, 홍보를 등에 업고 공식 개봉한 것은 10월 12일. 그 뒤로 약 3주가 지난 10월 말까지, 국내 누적 관객수가 고작 31만 4000여명에 그친 것이다. ‘저주받은 걸작의 귀환’이자 ‘거장의 계보를 완성하는 작품’이라는 개봉 전 기대와는 너무도 다른 결과다.


이는 비단 한국만의 상황이 아니다. 10월 6일 미국에서 공식 개봉 이후 10월 말까지, 미국에서 8200만 달러, 기타 해외에선 1억 4100만 달러 등 총 흥행수익이 2억 2300만 달러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제작비 1억 5000만 달러는 넘어섰지만, 홍보비 등을 생각하면 일각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폭망’이라는 평가가 인색해 보이지 않는다. (참조: 박스오피스 모조)

 

'블레이드 러너 2049'가 폭망(bombed)했다는 포브스지의 기사

그런데 한편에는 이러한 저조한 흥행 성적을 이해할 수 없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거장의 전편을 훌륭히 계승했다는 평론가들의 호평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열성 팬들의 경외감에 찬 감상문들로 소셜미디어가 도배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AIㆍ로봇ㆍAR 등 최근 주목받는 신기술들을 다루고 있다는 측면에서도, 흥행 요인은 충분했다.


그러나 이는 전편을 저주받은 걸작이라고 부를 때, ‘걸작’이 아니라 ‘저주받은’에 방점이 찍혀있다는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여기서 저주란, 전편이 1982년 6월 미국에서 개봉된 이후 3300만 달러(그 해 개봉작 중 27위)라는 저조한 흥행실적 때문에 해외 개봉도 못하고 막을 내린 상황을 의미한다.


그렇게 묻힐 뻔 했던 작품이 다시 주목 받게 된 것은 VHS와 LD 를 통해 뒤늦게 이 영화를 ‘발견’한 평론가들과 SF팬들이 늘어나고, 동시에 감독 리들리 스콧의 몸값이 올라간 뒤였다. 그런 흐름을 잘 읽은 제작사 워너브라더스가1992년 감독판을 개봉하고 2007년 이른바 최종판(Final cut)을 개봉하면서, 컬트 현상이 확산되며 어느 순간 걸작으로 부활하게 된 것이다.

 

'블레이드 러너'의 주요 5개 버전

그런 뒤늦은 발견과 부활은, 시대를 앞서간 철학적 미학적 사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인공지능이 탑재된 로봇이 자신의 창조주를 찾아와 생명의 연장을 요구하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뒤 창조주를 살해했지만 자신을 쫓던 추적자의 생명을 구하는 일련의 종교ㆍ철학적인 사건들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SF영화의 절정이라고 평가 받은 비주얼 아트를 통해 완벽하게 시각화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명백하게 ‘블레이드 러너’는 ‘스타워즈’나 ‘스타트렉’과 같은 대중 영화가 아니었다. 영화가 던진 심오한 질문들을 둘러싼 논란과 비주얼 아트에 대한 찬사는, 대중들이 쉽게 이해하고 참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처음부터 아니었다. 따라서 속편이 개봉되기 직전까지도 ‘블레이드 러너’는 컬트의 영역 안에서 한번도 나온 적이 없었다.

 

포스트모던 비주얼 아트의 정수라고 불린
포스트모던 비주얼 아트의 정수라고 불린 '블레이드 러너'의 한 장면

문제는 그런 명확한 한계를 속편의 감독과 제작ㆍ배급사가 애써 무시했다는 점이다. AIㆍ로봇ㆍAR 등이 일상 대화의 소재가 되고 그에 따른 철학적 사회적 경제적 이슈들을 연일 미디어에서 다루고 있으니, ‘블레이드 러너’의 세계관이 컬트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다.  거기에 전편의 비주얼 아트까지 그대로 전승한다면 걸작의 명성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본 듯 하다.


그러나 드니 빌뇌브의 속편은 철학적으로 비주얼적으로 단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체, 너무 큰 기대를 받으며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무엇보다 여전히 인간에 가까워지길 원하는 리플리컨트들이 혁명을 통해서라도 자신들의 자유를 찾으려 한다는 설정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철학적으로 고민했던 그들의 선배들보다 훨씬 단선적으로 보였다.


거기에 천재 과학자 월레스(자레드 레토 분)가 리플리컨트들의 생산을 가속화하여 우주를 정복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는 다소 이해하기 인물로 그려지면서, 캐릭터 간의 긴장감은 붕괴되었다. 그 사이에서 엉뚱하게 방황하며 눈요기거리만을 제공하는 주인공 K(라이언 고슬링 분)와 그의 AR여친 조이(아나 디 아르마스 분)의 에피소드들이 허탈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전편의 비주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전편의 비주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블레이드 러너 2049'

비주얼 측면에서도 속편은 전편을 계승했을지는 몰라도,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일본어 간판들 몇 개가 중국어나 한국어로 바뀐 것들을 빼면, 35년만에 개봉된 속편의 비주얼은 전편의 동어반복이라고 폄훼되기 딱 좋은 수준이다. 불편한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음향효과만은 전작을 뛰어넘었다고 평가받을 수는 있겠으나, 대세를 뒤집을 수준은 아니었다.


만약 속편이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가진 새로운 질문들을 과감하게 던졌다면 어땠을까? 예를 들어 ‘자신들의 자리를 리플리컨트들에게 넘겨준 인간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였다면, 지금과는 다른 평가를 받았을 수도 있다. 우리가 속편에서 기대한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에 대한 ‘블레이드 러너’적 해석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 필자소개
이철민. 학부에서 계산통계학을 전공하고 국내 IT기업들에 재직하다 미국 유수의 MBA과정에서 경영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뒤 세계적인 경영컨설팅 회사에서 일했으며, 현재는 국내 사모펀드(PEF)에서 M&A 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씨네21』, 『동아일보』, 『한겨레신문』등에 다양한 칼럼을 연재한 바 있으며, 저서로는 『인터넷 없이는 영화도 없다』, 『MBA 정글에서 살아남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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