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와 곳 22] 외가: 고향보다 더 그리운 곳

2017년 09월 16일 18:00

두 번째 고향이 있다. 누구에게나 태어나고 자란 애초의 고향이 있고, 또 다른 생활을 위해 그곳을 떠난 사람들이 새롭게 터전을 잡은 거주지를 흔히들 제2의 고향이라고 일컫지만, 그 지칭에는 ‘고향’이라는 근원적 그리움은 없다. 그보다는 그곳의 지상에서 매일 짜이는 희로애락의 매듭이 촘촘해 삶의 긴장감이 먼저 느껴진다. 물론 고향에서 보낸 시절이 다 좋았을 리 만무하지만, 고향을 떠나 살고 있는 많은 이들이 몸과 마음이 힘들 때면 향수(鄕愁)에 젖는 일은 자연스런 정서일 테다. 그 그리움은 막연하게 시작되어도 안개가 걷히면 산천이 드러나듯이 그리움이 깊어지면 어느새 기억은 생생해져 추억의 현장으로 마음을 데려간다.

 

GIB 제공
GIB 제공

고향보다 더 그리운 곳도 있을까. 있다면 그곳은 ‘외가’가 아닐까. 우리가 출생하기까지의 고향은 어머니의 배 속이었고 갓난아이였을 땐 그 품속이었으니 우리의 첫 고향은 어머니일 것이고, 어머니의 고향은 ‘외가’이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향의 뿌리인 ‘외가’는 그리움의 진앙지일 테다. 그런 그곳의 계절은 내 경우에는 여름과 겨울만 있다. 오래전 내가 외가를 방문했을 때는 매번 방학 중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매년 여름과 겨울에 방학이 시작되면 사흘도 안 돼 서둘러 시외버스에 올랐다. 흙먼지를 풀풀 날리며 산과 강을 낀 지방도로를 두어 시간 달려간 낡은 버스에서 내리면 충북 보은읍이었다. 다섯 살 터울의 형과 동행한 날은 우리 형제는 도로를 따라 외가를 향해 걸었다. 외가 동구까지 읍내에서 십 리였으니 1시간 남짓 걸렸으리라. 나 혼자 터미널에 내렸을 때는 외할머니께서 마중 나와 계셨다. 상봉했을 때, 외할머니의 환한 웃음은 이후 한 달가량의 내 외가 생활의 밝은 전조였다.

 

낡은 초가였던 외가는 한여름에도 선풍기 하나 없어도 그리 덥지 않았다. 기울어가는 해를 등에 지고 걸어오느라고 등허리가 땀에 젖었던 외손자에게 외할머니는 집에 당도하자마자 등목을 시켜주셨다. 뒤꼍에서 마중물로 퍼 올린 지하수는 얼음만큼 차가웠기에 외손자의 등허리는 금세 추워졌다. 곧바로 외할머니는 부엌으로 들어가셨고, 잠시 후 산그늘이 내려와 모색(暮色)이 짙어질 때 외할아버지께서는 모깃불을 피우고는 앞마당에 원형 멍석을 깔았다. 그러고 나면 어느새 소반에 차려진 밥상이 멍석 한가운데 놓여졌다. 외가에서만 맛볼 수 있었던 우렁이된장찌개와 그 짙은 된장찌개에 적셔 먹던 여린 호박잎은 물론이고 젓갈 없이 무친 어린 열무겉절이와 묽은 보리고추장만으로도 나의 고봉밥은 금방 비워졌다.

 

외가의 방은 두 칸이었지만, 전등은 천장 가까운 벽에 구멍을 뚫어 매단 막대 형광등 하나뿐이었다. 그것으로 작은 양쪽 방을 희미하게 밝혔던 불빛은 밤 9시가 조금 지나면 꺼졌다. 그러면 그때나 지금이나 밤잠 없는 나는 얇은 요에서 뒤척이다가 변소에 가는 척하고 살며시 띠살문을 열고 나와서는 간간히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를 들으며 마당에서 오랫동안 은하수를 바라보았다. 이튿날 아침은 늘 독상(獨床) 앞에 앉았다. 이미 밭에서 오전 농사를 마치신 외할머니께서 돌아온 직후였으니 해가 높이 떠 있었다. 그렇듯 외가가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아침 기상 시간이었다. 집에서야 방학 중에도 선친께서 출근하시기 전에는 일어나 선친의 구두를 닦아놓아야 했지만, 외가에서만큼은 방광이 땡땡해져 스스로 일어나기 전까지는 내버려두셨기 때문이다.

 

GIB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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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잠은 밤잠대로, 낮잠은 낮잠대로 외가에서의 잠은 수박처럼 다디달고 시원했다. 특히 점심을 먹은 뒤 앞뒷문을 열어놓고 서늘한 황토 맨바닥에 누워 있으면 산들바람이 솔솔 불어와 맨살을 간지럽혔다. 옆집 문식이네에서 들려오는 ‘정오의 희망곡’ 라디오 소리와 함께, 짝을 찾기 위해 곳곳에서 울어대는 매미 소리는 더없는 자장가였다. 까무룩 낮잠에서 일어나면 외할머니께서는 너무 이르게 떨어진 땡감을 소금물에 우려내 떫은맛을 없애 건네주시거나, 검은 알이 박힌 못난이 옥수수를 삶아 양은그릇에 담아 내미셨다. 나는 그중 하나를 입에 물고 한낮에는 집에서 쉬고 있을, 내 동갑내기인 앞집 인태네나 옆집 춘식이네로 마실을 갔다. 돌이켜보면, 종종 집안의 들일을 도와야 했던 그 두 친구는 내가 외가에 오면 여러 날 휴가를 얻는 셈이었다. 부안 임씨 집성촌이었던 외가의 친구들 부모님 역시 도회지에서 찾아온 이웃집 외손자를 제 육친인 양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 두 친구에게 나는 당시 농촌의 여가 생활의 모든 것을 배웠다. 여름이면 자주 개울에서 놀았는데, 그러면서 나는 자연스레 수영을 배웠다. 비록 개헤엄일지라도 어느 날 나는 아이들을 따라 두 다리로는 텀벙텀벙 물장구를 치면서 고개를 내밀고 물살을 가를 수 있었다. 그러다가 자맥질까지 할 수 있게 되자 강바닥에서 예쁜 조약돌들을 주워 올라와 물가에서 물수제비를 날리거나 집에까지 가져와 마루 끝에 모아두곤 했다. 겨울이면 썰매를 들고 산 아래 논으로 갔다. 그곳 논에 많이 고인 물이 얼어 자연 스케이트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이들과 함께 굵은 철사와 송판으로 만든, 바둑판만 한 썰매에 무릎을 꿇거나 쪼그려 앉아 지팡이질을 했지만, 나중에는 스키어처럼 일어선 채로 대못이 박힌 긴 지팡이에 힘을 주어 얼음 위를 쌩쌩 달렸다.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는 게 시간의 상대성이니, 외가에서의 마냥 즐거운 시간은 마치 죽은 시계를 되살리려 시계 뒤판의 다이얼을 돌려서 분침을 뱅뱅 돌리는 것만큼이나 빨리 지나갔다. 나는 집에서 떠나올 때처럼 개학을 이삼 일 남겨두고 외가를 떠나야 했다. 떠나기 전날이면 매번 외할아버지께서는 밖에서 거나하게 약주를 드시고서 저녁에 귀가하셔서는 내게 박하사탕 한 봉지를 주셨다. 그것이 외할아버지 식의 작별 인사였다. 반면, 이튿날 버스에 오를 때까지 배웅해주시는 분은 늘 외할머니였다. 버스가 출발하면 나는 차창 밖의 외할머니를 따라 손을 흔들었다. 매번 외할머니께서는 한 손으로는 손을 흔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당신의 눈물을 훔치셨다. 버스는 멀어지고 그렇게 서로가 소실점으로 사라지실 때까지…… 지금, 그 모습을 추억하자니 별안간 시야에 물결이 인다. 그러니, 내게 ‘외가’는 고향보다 더 그리운 곳이다.

 

 

※ 편집자 주

[마음을 치는 시(詩)]와 [생활의 시선]에 연이어 윤병무 시인의 [때와 곳]을 연재합니다. 연재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시간과 장소’에 초점을 맞춘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 ‘시간’은 오래되어 역사의 범주일 수도 있고, 개인 과거의 추억일 수도 있고, 당장 오늘일 수도 있고, 훗날의 미래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장소’는 우리가 생활하는 바로 ‘이곳’입니다. 그곳은 우리가 늘 일상의 공간에서 발 딛고 서 있는 희로애락이 출렁이는 삶의 현장입니다. 너무 익숙하거나 바빠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한 그 ‘곳’을 시인의 눈길과 마음의 손을 잡고 함께 가만히 동행해보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의 구체적인 현지와 생생한 감수성을 잠시나마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 필자 소개

윤병무. 시인. 시집으로 ‘5분의 추억’과  ‘고단’이 있으며, 동아사이언스 [생활의 시선]을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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