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의 과학카페] 게놈편집으로 흰 나팔꽃 만들었다!

2017년 09월 12일 10:00

나팔꽃
한 송이 깊이 모를
심연의 빛깔
- 부손(蕪村)


꽃 피기 전에는
기대하는 이도 없는
진달래여라
- 하리쓰(破笠)

 

많은 작가들이 머리맡에 수첩을 두고 잠을 잔다고 한다. 비몽사몽간에 아이디어가 퍼뜩 떠올랐을 때 바로 적기 위해서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메모하면 되지….’라고 생각했다가 제대로 기억을 못해 안타까웠던 일을 몇 차례 겪으며 만든 습관이란다.


이렇게까지는 못해도 신문이나 책을 읽다가 멋진 구절을 발견하거나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메모를 하거나 스크랩(또는 휴대전화 촬영)을 해야 하는데 게으른 필자는 그것도 미루다가 잊어버리곤 한다. 그래서 막상 이런 구절을 인용하면 딱 좋은 글감을 찾은 뒤에야 그때 적어두지 못한 걸 아쉬워한다. 바로 지금처럼.


지난 봄 한 소설가(아니면 시인?)가 쓴 글을 읽다가 ‘벚꽃이 피었을 때에야 우리는 주변에 벚나무가 있는 줄 안다’는 요지의 문장을 읽고 무릎을 쳤다. 식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면 벚꽃이 핀 시기가 아닐 때 벚나무는 그저 나무일뿐이니 말이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요즘이 나팔꽃이 피는 때다. 필자가 자주 산책하는 천변의 나팔꽃 사진으로 왼쪽은 전형적인 색깔의 꽃을 피운 나팔꽃과 둥근잎나팔꽃의 덩굴이 서로 엉켜 자라고 있는 모습이다. 가운데는 하늘색 꽃이 핀 나팔꽃이고 오른쪽은 짙은 남보라색 꽃이 핀 둥근잎나팔꽃이다. - 강석기 제공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요즘이 나팔꽃이 피는 때다. 필자가 자주 산책하는 천변의 나팔꽃 사진으로 왼쪽은 전형적인 색깔의 꽃을 피운 나팔꽃과 둥근잎나팔꽃의 덩굴이 서로 엉켜 자라고 있는 모습이다. 가운데는 하늘색 꽃이 핀 나팔꽃이고 오른쪽은 짙은 남보라색 꽃이 핀 둥근잎나팔꽃이다. - 강석기 제공

나팔꽃 두 종 자생


‘나팔꽃이 이렇게 많았나?’
매일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하는 천변이지만 며칠 전에야 필자는 곳곳에 나팔꽃이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으며’ 지난 봄 읽은 벚꽃 문구가 떠올랐다. 덩굴식물인 나팔꽃이 벌써부터 있었겠지만 전혀 존재를 감지하지 못하다가 꽃이 피고서야 나팔꽃을 ‘발견’한 것이다. 지난 봄 벚꽃 문장을 적어뒀다면 이글의 맨 앞에 직접 인용하면서 좀 더 세련되게 글을 시작했을 텐데.
 

아무튼 예쁜 꽃이 피고서야 나팔꽃의 존재를 알아본 게 미안해진 필자는 나팔꽃을 나름 자세히 관찰해보기로 했다. 그 결과 나팔꽃의 꽃 색이 파란색과 자주색 두 가지뿐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가끔 색이 바랜 하늘색 꽃도 보였고 짙은 남보라색 꽃도 있었다. 그리고 천변의 나팔꽃이 한 종이 아닌 것 같다는 뜻밖의 발견도 했다. 즉 잎의 생김새가 세 갈래로 갈라진 개체와 함께 하트 모양의 둥그스름한 개체도 있었다. 꽃의 색이야 같은 계열의 색소(아마도 안토시아닌일 것이다)라도 분자의 디테일 차이나 농도에 따라 자주색에서 파란색 범위로 분포할 수 있겠지만 잎의 생김새 차이는 좀 더 본질적이라고 느껴졌다.

 

문득 나팔꽃도 일종의 외래식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천변의 많은 식물들이 나팔꽃 덩굴 등쌀에 숨막혀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담장에 예쁘게 피어있는 다소곳한 나팔꽃 이미지와는 거리가 좀 느껴진다.


집에 와서 이유미 국립수목원 원장이 남편 서민환 국립환경연구원 연구관과 함께 쓴 ‘어린이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풀백과사전’(필자가 보기에 어린이 책이 아니다!)을 뒤적거려보니 정말 두 종이 맞았다. 잎이 세 갈래인 게 나팔꽃(학명 Ipomoea nil)이고 하트모양인 게 둥근잎나팔꽃(또는 미국나팔꽃, 학명 Ipomoea purpurea)이다. 책을 보면 두 종 모두 “꽃을 감상하려고 외국에서 씨앗을 들여다 심었는데, 우리나라 자연 환경이 살기 알맞아서 이제는 아예 터를 잡아 저절로 자란다”고 나와 있다. 그러고 보면 천변의 나팔꽃이 바로 이런 경우 아닐까.

 

최근 일본 연구자들은 게놈편집기술로 색소(안토시아닌) 생합성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DFR-B 효소를 망가뜨려 흰 나팔꽃(왼쪽)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 쓰쿠바대 제공
최근 일본 연구자들은 게놈편집기술로 색소(안토시아닌) 생합성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DFR-B 효소를 망가뜨려 흰 나팔꽃(왼쪽)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 쓰쿠바대 제공

색소 합성 효소 유전자 표적 절단


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츠’ 8월 30일자에는 게놈편집기술로 꽃잎이 하얀 나팔꽃을 만드는데 성공했다는 일본 연구자들의 논문이 실렸다. 일본사람들은 나팔꽃을 전통적인 원예 식물로 귀하게 여기는 것 같다. 지난해에는 나팔꽃의 게놈을 해독하기도 했다.

 
논문을 보면 나팔꽃(Ipomoea nil)의 영문명이 Japanese morning glory(일본나팔꽃)이다. 그럼에도 재배 역사를 기술한 걸 보니 8세기에 중국에서 약용식물로 들여와 원예식물로 ‘용도변경’을 했다. 문득 ‘우리풀백과사전’에서 언급한 외국이 중국일까 일본일까 궁금해진다.


류시화 시인이 번역하고 주석을 붙인 하이쿠(17자로 된 일본의 정형시) 선집 ‘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를 보면 나팔꽃이 등장하는 시가 십여 편이나 된다. 글 맨 앞에 인용한 하이쿠 두 수도 이 책에서 뽑았다. 일본어로 나팔꽃은 ‘아사가오(アサガオ, 朝顔)’, 즉 아침얼굴로 영어 morning glory와 통하는 데가 있다.


아무튼 일본 원예가들은 나팔꽃을 애지중지했고 많은 품종을 개발했다고 한다. 20세기 들어서는 유전학자들도 뛰어들어 1910년대까지만 해도 나팔꽃의 염색체 지도가 식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앞서는 수준이었다. 지금도 나팔꽃은 원예식물의 모델로 다양한 측면에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연구자들은 지난 수년 사이 대유행하고 있는 3세대 게놈편집기술인 크리스퍼/캐스9(CRISPR/CAS9)을 원예식물에 적용할 때 제대로 작동하는지 시험해보기 위해 나팔꽃의 꽃잎색 관련 유전자를 택했다. 즉 자주색에서 파란색에 이르는 꽃잎의 색소인 안토시아닌을 합성하는데 관여하는 효소들 가운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DFR-B라는 효소의 유전자를 크리스퍼/캐스9으로 망가뜨리는데 성공한다면 색소를 못 만들어 흰 꽃이 필 것이라고 예상했다.


사실 흰 나팔꽃은 1631년 그려진 그림 속에서 처음 등장했다. 즉 일본에 나팔꽃이 소개된지 대략 850년 뒤에 변종이 등장한 것이다. 이후 게놈 분석을 통해 DFR-B 유전자의 돌연변이로 효소가 작동을 못하면서 흰 나팔꽃이 나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번 연구는 자연 상태에서 850년 만에 일어난 변이를 1년 안에 재현하는 실험인 셈이다.

 

포도에서 안토시아닌을 만드는데 관여하는 DFR-B 효소의 결정 구조에서 촉매 활성 자리를 클로즈업한 이미지다. 효소 활성에 190번째 아미노산인 프롤린(Pro190A)이 중요하다. 나팔꽃 DFR-B에서는 195번째 아미노산인 프롤린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게놈편집으로 197번째 아미노산인 류신이 없어지면 배치가 틀어지면서 제 역할을 못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 Acta Crystallographica 제공
포도에서 안토시아닌을 만드는데 관여하는 DFR-B 효소의 결정 구조에서 촉매 활성 자리를 클로즈업한 이미지다. 효소 활성에 190번째 아미노산인 프롤린(Pro190A)이 중요하다. 나팔꽃 DFR-B에서는 195번째 아미노산인 프롤린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게놈편집으로 197번째 아미노산인 류신이 없어지면 배치가 틀어지면서 제 역할을 못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 Acta Crystallographica 제공

연구자들은 DFR-B 유전자 가운데 촉매 활성 자리를 암호화하는 네 번째 엑손을 표적으로 삼았다. 즉 네 번째 엑손의 특정 부분과 서열이 상보적인 염기 20개를 포함한 안내RNA(gRNA)의 유전자와 함께 DNA를 자르는 효소인 CAS9 유전자를 넣은 플라스미드(원형 DNA)를 담은 박테리아를 나팔꽃 배아에 감염시켰다. 그러면 플라스미드가 식물 게놈으로 끼어 들어간다.


식물 세포 안에서 만들어진 CAS9 효소는 gRNA가 인식하는 표적서열에 가서 DNA를 자른다. 게놈(염색체)이 두 동강난 비상사태를 맞은 식물체는 서둘러 다시 이어붙이려고 시도하는데 그 과정에서 실수가 생길 가능성이 크다. 연구자들이 노리는 게 바로 식물의 복구시스템오류다.


이렇게 얻은 개체 가운데 3분의 1 정도에서 흰 꽃이 폈다. 즉 게놈편집으로 DFR-B 유전자가 못쓰게 된 것이다. 염기서열을 분석한 결과 복구 과정에서 여러 실수가 나온 것으로 밝혀졌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복구 과정에서 염기 세 개를 빼먹으면서 197번째 아미노산인 류신이 없는 효소가 만들어졌다. 그 결과 활성 자리 구조가 크게 바뀌어 효소 활성에 중요한 195번째 아미노산인 프롤린의 위치가 틀어져 더 이상 효소로 작용하지 못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개체에서 다음 세대를 얻는 과정에서 식물 게놈에 끼어들어간 gRNA와 CAS9 유전자를 넣은 플라스미스 부분을 없앨 수 있다. 이 경우 식물 게놈에 외부 유전자가 없고 자기 유전자만 편집된 개체이기 때문에 유전자재조합생명체(GMO)가 아니라는 말이다. 참고로 지난달 일본 연구자들이 개발한 파란 국화의 경우 다를 식물 두 종(초롱꽃과 나비콩꽃)의 유전자가 들어간 GMO다.


연구자들은 이번 시도가 크리스퍼/캐스9 시스템을 사용해 꽃의 색을 바꾼 최초의 시도라며 앞으로 원예식물 육종에 이 기술이 널리 쓰일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 필자소개
강석기. 서울대 화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지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4권, 2012~2015),『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2014)가 있고, 옮긴 책으로 『반물질』(2013), 『가슴이야기』(201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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