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와 곳 15] 열쇠꾸러미도 기다리는 곳: 버스정류장

2017년 07월 29일 17:00

저녁 8시경. ㄱㄱ초등학교 맞은편 버스정류장 철제 벤치에 열쇠꾸러미가 덩그마니 놓여 있다. 누군가가 벤치에 앉아 버스를 기다렸나 보다. 자신을 찾는 전화 벨소리에 휴대폰을 꺼내려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나 보다. 함께 딸려 나온 열쇠꾸러미를 무심코 벤치에 놓았나 보다. 그러고는 통화가 길어졌나 보다. 통화에 몰입해 있는 사이에 기다리던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했나 보다. 서둘러 버스에 승차했나 보다. 열쇠꾸러미를 남겨두고 버스에 오른 주인은 표표히 떠났나 보다.

 

GIB 제공
GIB 제공

한 아주머니가 버스에서 내렸다. 환승하려는지 철제 벤치에 앉았다. 열쇠꾸러미를 발견한 그분이 두 손가락 끝으로 그것을 한번 들어 올려 살피고는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횡단보도를 건너온 또 다른 아주머니가 다가와 열쇠꾸러미를 사이에 두고 철제 벤치에 앉았다. 그것을 두고 낯모르는 두 분이 말씀을 나누신다. 그러다가 먼저 오신 아주머니가 가방에서 잼 병을 꺼내신다. 병뚜껑이 열리지 않는단다. 열거나 잠그는 도구인 열쇠를 보니 본인의 닫힌 잼 병이 생각났을 테다.

 

“그럴 땐 닫히는 방향으로 돌렸다가 열리는 방향으로 돌리면 돼요.”

 

주방생활 노하우를 알려준 아주머니가 잼 병을 쥐고 양방향으로 두 번 비트니 정말 병뚜껑이 쉽게 열렸다. 두 분이 환히 웃고 있을 때 연달아 여러 대의 버스가 도착했다. 두 분은 서로 다른 버스를 타고 떠났다. 곧이어 내가 기다리던 버스도 도착했다. 버스 단말기에 신용카드를 읽혔다. 단말기가 말했다. “환승입니다.”


버스정류장의 열쇠꾸러미는 어찌 됐을까. 열쇠가 없어서 어떤 ‘닫힘’ 앞에서 곤란해 할 주인은 잃어버린 곳을 기억할 수 있을까. 생각은 이어져, 환승한 마을버스를 타고 귀가하는 동안 오래전 나의 선배의 지인의 에피소드가 생각나서 피식 웃었다. 30년쯤 전에 들은 얘기다. 서울 생활을 해본 적 없는 선배의 지인이 서울에 올라와 신촌에서 술을 많이 마시고는 혼자 2호선 전동열차에 승차했단다. 그런데 취중의 그 양반이 전동열차를 어느 집으로 착각했는지 자동문이 열리자 문 앞에 신발을 벗어놓고 승차했단다. 의자에 앉아 곧바로 잠든 그분이 한숨 자고 일어나자 열차는 달리고 있었고 다음 정차역이 승차했던 신촌역이었단다. 그제야 자신의 신발이 없는 것을 발견한 그분은 주위 승객에게 민망해 서둘러 하차했단다. 자동문이 열리고 문 앞 발밑을 보니 자신의 신발이 벗어놓은 그대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단다. 실소 끝에 나는 열쇠꾸러미를 놓고 간 분도 오래전 신발처럼 고스란히 찾게 되기를 바랐다.


그날처럼 평일 퇴근길이면 나는 그곳 버스정류장에서 환승을 한다. 보통은 081번 마을버스로 갈아타고 귀가하지만 어느 때는 불쑥 11번 시내버스에 올라 내가 좋아하는 IPA가 있는 수제 생맥줏집으로 향한다. 집은 집대로 안식처이고, 펍(pub)은 펍대로 휴식처이다. 양쪽을 선택할 수 있는 그곳에서 나는 버스를 기다리고, 달려온 버스는 내게 문을 열어준다. 행인들도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곳곳의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정류장에 승객이 과도하게 늘어나면 운행이 지체되기에 버스는 바쁘다. 유비쿼터스 센서를 부착한 버스들이 부지런히 움직여 버스 간에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노선을 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GIB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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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로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인지 대도시일수록 버스정류장을 오가는 버스들의 분주함은 가속된다. 교차로가 많은 거미줄 같은 도로에서 적절한 속도와 간격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일 테다. 그 차이는 지방 소도시나 소읍에 가 보면 금방 실감한다. 경상도 경주든 충청도 보령이든 내 경험으로는 한결같았다. 심지어 연만한 시내버스 기사는 연로하신 승객들과 허물없이 흰소리까지 주고받는다. 버스정류장을 떠나 백 미터나 진행했음에도 도로변에서 엉거주춤 손을 들면 버스 기사는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할 필요도 없이 정차해 버스 문을 열어준다. 더욱이 버스정류장을 향해 부지런히 힘들게 걸어오는 꼬부랑 할머니에게는 정차한 지 1분은 되었음에도 너무 서두르지 마시라며 핀잔까지 준다.


방방곡곡 어디든 주로 서민들이 이용하는 버스정류장은 실수로 인한 분실의 장소이기도 하고, 낯선 이와 잠시 수다를 나누는 곳이기도 하고, 목적지 선택을 놓고 즐거운 갈등을 하는 장소이기도 하고,  오래전 에피소드를 추억하며 실소나 미소를 일으키는 곳이기도 하다. 어딘가로 떠나기 위해 승차하거나 어디선가 승차해 당도하는 곳, 그곳이 어디든 버스정류장은 오늘의 다양한 삶을 진행 중인 승객이 기다리는, 승객을 기다리는 멈춤과 떠남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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