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의 과학카페] 산불의 추억

2017년 03월 28일 16:00

불은 하인일 때는 나긋하지만 주인이 되면 난폭해진다.
- 속담

 

2005년 4월 4일 밤 강원도 양양군의 한 야산에서 발생한 산불이 제대로 진화가 안 돼 큰 불로 번지면서 인근 낙산사까지 불바다가 되는 참사로 이어졌다. - 연합뉴스 제공
2005년 4월 4일 밤 강원도 양양군의 한 야산에서 발생한 산불이 제대로 진화가 안 돼 큰 불로 번지면서 인근 낙산사까지 불바다가 되는 참사로 이어졌다. - 연합뉴스 제공

결과보다는 동기가 중요하다고 말들은 하지만 살다보니 막상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우리 삶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어떤 행동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일이 잘못된 책임을 다 뒤집어쓰는 경우도 있고 엄청난 실수를 했음에도 별다른 피해가 나지 않아 유야무야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이 와 닿는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30년 전인 1988년 이맘때 일이다. 필자는 신생 고교를 나왔는데 당시 대학에 동문이 몇 명 안 됐다. 그런데 그해 후배들이 열 명 넘게 들어왔다. 동기 한 친구가 후배들에게 낭만적인 추억을 남겨주고 싶었는지 토요일 낮에 학교에서 삼겹살을 구워먹자는 제안을 했다. 서울대는 원래 골프장이었다는데 동쪽에 넓은 잔디밭이 있고 관악산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해서 그 친구와 필자, 후배 네댓 명이 모였다. 날은 좋았지만 바람이 꽤 불었다.


그런데 가져간 가스버너를 쓸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결국 시골 출신인 그 친구가 후배 두세 명을 데리고 불을 피웠고 나머지는 땔감으로 쓸 잔가지를 모으러 주변으로 흩어졌다. 이정도면 됐나 싶어 고개를 돌리는데 불을 피우던 친구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보인다. ‘뭐하는 거야?’


가까이 가니 불을 피우다 주변으로 불똥이 퍼져 몇 군데 불이 붙어 허겁지겁 끄고 있는 상황이었다. 놀란 필자는 땔감을 내던지고 뛰어갔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불을 곧 끌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간신히 눈앞에 불을 끄고 나면 어느새 등 뒤에 새로운 불이 붙어 있었다. 바람에 불똥이 날리며 하나 끄면 둘이 생기는 형국이 된 것이다.


스무 살 청년 여럿이 달라붙었음에도 불은 점점 번지고 있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느껴지자 겁이 덜컥 났다. 그런데 그 순간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필자는 그 뒤 동기 친구와 이때 상황을 여러 번 회상했는데 그때마다 과연 그게 실제 일어난 일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우리가 불을 끈다고 절망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을 때 어디선가 아저씨 몇 명이 달려온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불은 진압됐다.


“학생들, 여기서 뭐하는 거야? 큰일 날 뻔 했잖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알고 보니 봄철 캠퍼스 내 잔디를 태우는 분들이었다. 트럭을 타고 외곽도로를 지나가던 중 우리를 목격하고 이상해서 차를 세우고 달려온 것이다. 일부러 불을 내고 끄는 게 일인 사람들이!


만일 그때 그분들이 그곳을 지나가지 않았다면 날씨 상황을 봤을 때 우리들이 불을 끄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는 휴대전화도 없던 때라 화재신고를 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을 것이고(그럴 정신이 있었을지도 의문이지만) 어쩌면 큰 산불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적어도 (몰지각한 선배인) 그 친구와 필자는 유죄판결을 받았을 것이다.


그때 너무 놀라 그 뒤 TV에서 산불 뉴스가 나오면 순간 가슴이 철렁한다. 특히 2005년 봄 양양 대화재로 낙산사가 불타던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잊을만하면 들리는 미국 캘리포니아와 호주의 화재 소식도 남의 얘기 같지 않다.

 

산불다양성이 조류의 종다양성으로 이어진다는 최근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소나무숲에서 일어난 산불들을 분석한 결과 불이 일어난 영역 내에서 피해 정도가 다양할 경우 각각에 맞는 종들이 찾아와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검은등딱따구리는 피해가 심한 곳(색이 짙은 영역)을 선호한다. - 사이언스 제공
산불다양성이 조류의 종다양성으로 이어진다는 최근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소나무숲에서 일어난 산불들을 분석한 결과 불이 일어난 영역 내에서 피해 정도가 다양할 경우 각각에 맞는 종들이 찾아와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검은등딱따구리는 피해가 심한 곳(색이 짙은 영역)을 선호한다. - 사이언스 제공

산불, 무조건 막는 게 능사는 아냐


학술지 ‘사이언스’ 3월 24일자에는 좀 특이한 관점에서 산불(들불을 포함한 개념)을 바라보는 글이 실렸다. 즉 적절하게 불을 내면 생명다양성을 높일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산불이 생태계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측면도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불을 내면서까지 생태계에 개입한다는 게 말이 되는 걸까.


호주 멜버른대 생명과학부 켈리 교수와 스페인 CREAF 루이스 브로톤스 박사가 쓴 이 글에서 소개된 개념은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해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로사에서 열린 캘리포니아 북서부 종다양성 심포지엄에서 버클리대 임학과 로버트 마틴과 데이비드 샙시스는 산불다양성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산불다양성(pyrodiversity)은 산불이 발생한 간격과 규모, 화재 정도가 어느 정도 다양한가를 가리키는 척도다. 예를 들어 수십 년 간격으로 강력한 대형 산불만 일어난다면 산불다양성은 낮다.


두 사람은 미국 서부의 산불 역사를 재구성한 결과 종종 일부러 산불을 내던 인디언들이 주인이었던 시절 산불다양성이 가장 컸고 유럽인들이 지배를 하며 인디언을 쫓아내고 특히 20세기 들어 정부가 산불억제정책을 본격화하면서 산불다양성이 급감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결과 이 지역에 사는 식물과 동물의 종다양성도 줄어들었다. 산불은 당연히 안 나야 하고 설사 나더라도 초기에 진압해야 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던 필자로서는 당황스런 얘기다.


인디언들이 일부러 불을 낸 건(물론 실화(失火)인 경우도 있다) 주로 사냥하기 좋게 전망을 트이게 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날이 덥고 건조해지기 전에 불을 내 불을 잘 통제했고 그 결과 화재 규모가 대체로 작았다. 결국 인디언이 통제하던 시절에는 산불이 골고루 적당한 간격으로 일어났다.


그런데 미국 정부가 본격적으로 산불 억제 정책을 펴기 시작하면서 산불 발생 건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번개 등 자연발화나 실화로 설사 산불이 나더라도 즉각 출동해 진화했기 때문에 대부분 규모가 미미했다. 그러다보니 숲에는 식물 바이오매스가 점점 쌓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고온에 가뭄이 지속되는 시기에 자연발화나 실화로 불이 나면 통제불능의 대형 산불로 이어지게 된다.


그 결과 1970년을 전후해 산불로 인한 피해 면적은 오히려 늘어나는 추세로 돌아섰다. 생태계 역시 동식물이 큰 타격을 입게 되고 종다양성이 줄어든 게 지난 20세기 동안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현대 사회에서 화재 억제력은 꼭 필요하다”면서도 “다만 자연생태계를 위해 불을 폭넓게 활용할 필요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 뒤 이들이 제안한 ‘산불다양성 종다양성 가설’을 지지하거나 반박하는 연구결과들이 이어졌는데 이번에 ‘사이언스’에 실린 글을 보면 이를 지지하는 최근 연구결과들을 몇 편 소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지난해 학술지 ‘영국왕립철학회보 B’에 실린 논문은 캘리포니아의 한 소나무숲에서 산불다양성이 서식 조류의 다양성을 높인다는 분석결과를 담았다. 즉 이 지역에서 일어난 화재 97건을 유형별로 분류해 화재 이후 1년에서 10년에 걸쳐 거주하는 새들의 종류를 파악한 결과 산불이 일어난 영역 내에서 피해 정도가 제각각일 때, 즉 산불다양성이 클 때 종다양성이 높았다.


이는 종에 따라 새들이 좋아하는 조건이 다른데 산불다양성이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검은등딱따구리(black-backed woodpecker)의 경우 산불이 심하게 난 곳에서 잘 산다. 불탄 나무 기둥을 선호하는 딱정벌레가 낳은 애벌레를 즐겨 먹기 때문이다. 산불다양성의 생태적 효과는 불이 난 이듬해보다는 10년이 지났을 때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기후변화로 대형 산불이 잦고 생태계도 취약해지면서 산불 정책도 억제 일변도에서 필요할 경우 불을 내는 전략으로 전환되고 있다. 스페인 동남부 알바세테의 한 숲에서 계획적으로 불을 놓은 장면이다. - Carla Vilarasau/the Pau Costa Foundation 제공
최근 기후변화로 대형 산불이 잦고 생태계도 취약해지면서 산불 정책도 억제 일변도에서 필요할 경우 불을 내는 전략으로 전환되고 있다. 스페인 동남부 알바세테의 한 숲에서 계획적으로 불을 놓은 장면이다. - Carla Vilarasau/the Pau Costa Foundation 제공

원주민의 지혜에서 배운다


그런데 최근 십여 년 동안 엘니뇨현상 등 급격한 기후변화로 고온과 가뭄이 지속되면서 미 서부와 호주, 동남아, 심지어 시베리아 등 세계 각지에서 대형 산불이 일어나는 빈도가 잦아지고 있다. 따라서 산불 정책도 무조건적인 억제 전략에서 필요하다면 적절한 규모의 불을 일으켜 바람을 미리 빼면서 동시에 생태계 다양성도 얻는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고 ‘사이언스’ 논문의 저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실제 생물다양성과학기구(IPBES)에서는 이런 결정에 대한 조언을 해주고 있고 스페인 등 몇몇 나라에서는 계획적으로 불을 놓는 생태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호주의 경우 원주민들의 오랜 노하우를 전수받아 비행기나 헬리콥터를 이용한 계획적인 방화를 진행하기도 했다. 호주 원주민들은 수만 년 전 이주한 이래 ‘불쏘시개 농업(fire stick farming)’이라고 불릴 정도로 불을 즐겨 이용했다. 그 결과 오늘날 호주의 풍경이 생겨났고 이런 환경에 적합한 캥거루나 굴드왕도마뱀 같은 동물들이 번성하게 됐다. 물론 이 녀석들은 원주민의 사냥감이다. 실제 한 원주민 노인은 “캥거루를 위해 불을 놓는다”고 말할 정도다.


최근 농촌진흥청은 농부들에게 농사철을 앞두고 논두렁을 태우는 행위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 불로 숨어있는 해충을 없애고 재는 거름이 된다고 하지만 막상 두렁을 태울 때 죽는 동물 가운데 해충은 11%밖에 안 되고 해충의 천적이 89%라서 오히려 역효과라고 한다. 괜히 사람만 다치고 잘못하면 산불로 번질 수 있으니 이제 그만 이런 관행을 끊자는 말이다.


옛날 같으면 100% 공감했겠지만 산불다양성에 대한 논문들을 읽고 나니 우리 조상들이 수백 년 어쩌면 수천 년 동안 효과도 전혀 없는 일을 관습적으로 했다고 치부하기엔 좀 찜찜하다. 그리고 2005년 양양 대화재 역시 당시 초동 진화작전 미숙 등이 불을 키웠다고 지적됐지만 오랜 기간 식생의 바이오매스가 축적되고 봄철 가뭄과 바람 등 모든 여건이 갖춰진 상태에서 버튼이 눌러진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나라의 산은 이제 어딜 가도 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고 이상고온과 가뭄 역시 일상이 된 것 같다. 산불예방과 함께 출구전략도 세워야 제2의 양양 대화재를 막을 수 있지 않을까.


 

※ 필자소개
강석기. 서울대 화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지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4권, 2012~2015),『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2014)가 있고, 옮긴 책으로 『반물질』(2013), 『가슴이야기』(201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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