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의 목소리 (11)] 합리적 질서 속의 평범함을 꿈꾸며

2017년 03월 26일 16:30


정한별(과학기술정책 읽어주는 남자들)


과학기술정책 이슈를 광범위하게 다루는 팟캐스트/페이지 운영자의 입장에서 과학기술계의 합리적 질서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 컨텐츠가 주로 다루는 대상이자 내 스스로의 정체성이기도 한 대학원생/신진연구자 집단(a.k.a 청년연구자)이 경험하는 현실에 입각하자면  ‘과학기술과 민주성’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나오고 있는 이야기들은 청년연구자에게 어떠한 메세지도 던지지 못하고 있다. 무엇이 바뀌든 청년연구자의 발언권과 결정권은 보장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보자.

 

호칭: 나는 누구인가의 문제로부터 시작되는 일상 속 비-민주.


사실 나는 대표도 무엇도 아니다. 그냥 대학원생이고, 과학기술정책 이슈를 정리해서 페이스북 페이지 운영하고 공부할 겸 자료를 생산할 겸 몇 마디 녹음한 파일을 무작위 송출할 뿐이다. 다양성 배려 차원에서 이 자리에 앉아있는 듯 하지만 딱히 사회적 직함이라 할만한 것이 없는 나는 아무리 봐도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이상한 직함으로 이 자리에 앉아있다.


한국에서 열리는 많은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은 대개 본인을 지칭하는 다양한 직함들을 동반하고, 이는 위계를 내포하는 사회적 지위를 나타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나는 그저 학생이다. 참석자가 위임 받은 대표성이 아닌, 조직의 직함을 나열한 자리에서의 토론이 합리적 질서를 논할 수 있을까? 이 논의가 민주적 제도의 실천을 지원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라는 사상적 틀이 제도적 실천으로 내려오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투표다. 투표의 핵심은 무엇인가: 너도 한 표 나도 한 표. 네 의견과 내 의견의 가치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과연 지금 이 자리는 어떠한가. 잘 모르겠다. 어떤 일을 하는, 어디서 일하시는 ~~님 정도만 해도 지금보다는 괜찮을 것 같은데, 나는 이미 설 자리가 좁다.

 


현재의 과학지식 생산 과정은 민주적인가


갑자기 별로 상관 없어 보이는 일을 지적하고 넘어가는가 하면, 연구의 입구에 서 있는 입장에서 과학기술계의 합리적 질서를 세우자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당장 이런 작고 일상적인 것들부터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 논지는 놀랍도록 간단하다. 지금 과학기술계 내부는 민주적인가? 과학기술 지식의 생산과정은 민주적인가?


그냥 현실을 이야기해보자. 대학의 신임 연구자들은 도대체 왜 대량의 강의를 떠맡아야 하는 것인가. 누구보다 연구 실적이 급한 이들에게 강의를 다 넘기면 이들은 연구를 언제 할 수 있을까? 이 로드 배분에 신임 연구자들의 의견이 과연 얼마나 반영 되었는지 의문이다. 아니, 애초에 제대로 들으려고 노력한 적이나 있을까 싶다. 최근에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와 〈대리사회〉가 고발하는 현실이 사회적으로 화제가 된 이후에도 이 문제에 대한 합리적인 해답을 민주적 절차에 따라 도출하려 시도한 적이 있나? 회의적이다.


한 층위 내려가서, 박사 후 과정(포닥) 연구자들의 사정은 어떠한가. 이들은 어중간한 경계에 위치해 심지어 통계에 제대로 잡히지도 않으며 대중들의 인지도 자체가 낮다. 게다가 종착지가 아닌 ‘거쳐가는’ 곳이기에 -그리고 계속해서 방랑해야만 하기에- 이들을 대변할 기구나 집단을 스스로 구축하는 것도 여의치 않다. 한국 과학기술계가 정말로 민주적이라면 이들의 속성을 이해하고 각 기구에서 이들을 보호할 제도를 구축하는 것이 지극히 합리적인 움직임이다. 물론, 지금의 한국에 이런 건 없다.


한 층위 더 내려가보자. 현재 대학원생들은 어떠한가. 이들은 심지어 졸업장도 없는 상태로 대개의 경우 개별 연구실에 귀속 되어있다. 각 연구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밖에서는 알 수 없으며, 많은 경우에 인건비와 졸업 여부 등 경제적-사회문화적 핵심 요인을 특정한 몇몇의 개인이 쥐고 있다. 즉,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 경우 추후 대처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구조에서 민주적 절차가 작동할 수 있을까. 아니, 합리적 질서를 논해볼 수나 있을까.


한 층위 더 내려갈 수도 있다. 예비 대학원생들. 이들이 처한 문제는 간단하면서도 가장 중요하다. 그들이 걷고자 하는 길에 대한 정보를 쉬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관심 분야에 따른 우선 순위 결정 정도야 어찌어찌 하겠지만, 각 연구실의 문화, 의사결정 프로세스, 출퇴근 규칙, 임금 구조 등 짧게는 2년 길게는 6년 이상 소속되어야 할 곳에 대한 정보가 비공개인 것이다. 이들은 사실상 합리적 선택의 권리를 침해당한 상태로 연구 인생을 시작한다.


이 구조는 민주적인가. 너무 추상적 질문이라면, 구체적으로 질문해보자. 이 구조에서 민주적 절차는 작동할 수 있는가? 개개인의 연구자들은 이해관계자들과 마주하고 “뒷일에 대한 근심 없이” 자신의 의지를 피력하며 그 결정 권한과 책임을 다른 구성원들과 공유할 수 있는가? 현재 이들이 책임지고 있는 다양한 일들 -강의, 프로젝트부터 행정 및 기타 잡무에 이르기까지- 은 어디로부터 부여된 책임이며, 그에 대해 이들이 확보한 대응 권한은 무엇인가?


다시 묻는다. 이런 불균형한 내부구조를 이야기하지 않고 과학기술과 민주적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금 나는 모든 곳에서 이런 일이 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 제도를 불가능하게 하는 구조가 내포하는 위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구조가 위험을 내포하고 있고 전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피해를 당할 ‘가능성’ 이 있다면 이에 대한 구조적 해법을 함께 고찰하는 것이 민주적 의사결정의 장점이라고 믿는다.


민주적이지 않은 시스템이 민주적 가치를 내포한, 그 가치에 기여하는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지식은 그것을 생산하는 개인과 집단의 다양한 가치판단을 거쳐 나온다는 주장에 입각해, 나는 이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설사 지극히 부분적으로 이것이 가능하다손 쳐도, 이 시스템 내부에 속한 사람들의 민주적 권리는 누가 보장해 줄 수 있는지 명확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 모든 논의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대체 누가 이들에게 자기 희생을 강요할 권리를 가지며, 그 권리는 누구와 어디로부터 위임되었는지 알 길이 요원하다.

 


학생, 신진연구자는 학문후속세대가 아니라 다른 학문세대이다.


학생 및 신진연구자를 묶어서 청년과학인이라 칭해 보자면, 이들을 규정하는 수많은 정체성 중 최근 들어 가장 뜨거운 단어가 바로 “학문후속세대”라는 말이다. 물론 선의를 내포한 단어이지만 사실 마냥 달갑지만은 않다.


훈련중인, 어딘가에 정착하려고 노력중인 젊은 연구자들을 100% 모두 수용할 시장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을 뭉뚱그려 학문후속세대라고 지칭하는 것은 기존 시장에 이미 편입된 이들의 입장이다. 물론 학문을 이어가고자 하는 학생들은 여전히 많겠지만, 이제는 학생들의 층위가 다양해져 1)학문을 이어가고는 싶지만 다른 현실적 이유로 힘든 학생들, 2) 학교나 연구소가 아닌 다른 곳에서 나름의 학문을 하고 싶어하는 학생들, 3) 학위를 받고 연구가 아닌 일을 계획하는 학생들, 4) 정말로 전혀 상관없는 일을 기획하는 학생들이 스펙트럼의 형태로 넓게 뒤섞여있다.


이들의 다면성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저 학문후속세대라 퉁쳐버리는 일은, 애초에 문제 파악이 잘못되었음을—혹은 현실의 문제를 마주할 의지가 없었음을—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잘못된 해결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거칠게 말하자면, 정말로 기존 학문의 ‘후속’ 세대가 될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청년층의 연구자 본인들에게만 있으며 이들은 후속세대가 되겠다고 선언한 적이 없다. 스스로 정의하지 않은 정체성에는 의미가 없으며, 이는 지금 과학기술계의 시스템에서 청년과학인 계층의 의사 발언 및 결정권이 사실상 제로에 가깝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기존 담론에서 우리는 “후속”세대, 즉 현 세대가 아니기 때문에 참관은 가능할지언정 현세대의 의제(agenda) 세팅이나 그 실천에 있어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결정의 여파에 가장 취약한 계층 또한 청년과학인이다.


지금까지 구구절절 서술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면 간혹 “그러면 너희들이 더 나서서 적극적인 의사 표명을 해라. 그러지 못한 너희의 책임도 있다” 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이제는 아니리라 믿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여 미리 반박하려고 한다. 간단히 말해서, 위의 주장은 이른바 “피해자 책임론”의 한 범주로 정의할 수 있다. 피해자 책임론의 사회적 폐해는 지극히 간단하고도 안타깝다.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무엇도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 발 더 가면 “피해자 유발론”이 된다. 이런 구조를 만들어낼 수 밖에 없는 직간접적 원인을 청년 연구자 층이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왜곡된 대상화의 결과물이다. 앞서 지적했지만, 청년층을 “후속”세대라고 정의한 것은 문을 두드리는 청년연구자가 아니라 기존의 연구자 계층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전제한 연구 초년생 이미지를 –잘 모르고, 미숙하고, 자신의 의견을 잘 말하지 않고, 본인이 무엇을 할지에 대한 생각이 뚜렷하지 않은- 현실의 청년연구자들에게 덧씌우고 그에 따라 선험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일종의 이론의존성(theory-ladenness) 이며, 민주적 연구 환경 구축의 걸림돌이다. 2017년 한국의 청년연구자들은 알만큼 알고, 성숙하고, 각자의 의견이 있고 서로 비판할 줄 알며, 실패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무엇을 할지(혹은 해야 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있다.

 


평범한 연구자


나는 민주적 가치가 “다수를 소수의 우위에 두는 것” 이라고 믿지 않는다. 제도적 실천으로써의 민주주의--투표--는 다수에게 실천의 우선권을 주었을 뿐, 사회적 가치 차원의 우열을 가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투표는 우리에게 소수의 존재를 알게 해준다. 다수가 만족할 가능성이 높은 시스템에 다양한 이유로 문제를 제기하는 다른 시민이 어느 정도 – 어떻게 분포해있는지를 알려주는 장치인 것이다.


덕분에 민주 사회에서는 모두가 ‘평범해질’ 가능성이 열려있다. 딱히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말하고 다니지 않아도 그냥 시민 –너도 시민 나도 시민- 일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게 도와주는 것이다. 과학계에서 진정으로 민주적 가치를 추구한다면 궁극적으로는 누구나 평범한, 별 다른 호칭 없이도 “과학기술인”이 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헌데 피교육자이며 교화의 대상이자 학문후속세대라는 껍데기에 둘러 쌓인 지금 한국의 청년과학기술인들이 평범해질 길은 멀고도 험난해 보인다.


과학기술인으로서 모두가 모두에게 평범한 대화 상대가 될 수 있는 곳에서야 비로소 진정한 합리적 질서에 대해 논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창출될 지식이 민주사회 구현에 크게 기여할 것을 의심할 이는 없을 것이다.

 

※이 글은 ‘과학기술계 합리적 질서 논한다: 전국순회 과학정책 대화’ 토론회에서 패널로써 발언할 예정이었던 내용의 원문입니다.

메일로 더 많은 기사를 받아보세요!

관련기사

인기기사

댓글

댓글쓰기

지금
이기사
관련 태그 뉴스

동아사이언스 SNS로
최신 소식을 받아 보세요!

  • 과학동아
    과학동아페이스북 과학동아카카오스토리 과학동아트위터
  • 과학동아천문대
    과학동아천문대페이스북
  • 어과동TV
    어과동TV페이스북
관련 태그 뉴스

동아사이언스 SNS로
최신 소식을 받아 보세요!

  • 과학동아
    과학동아페이스북 과학동아카카오스토리 과학동아트위터
  • 과학동아천문대
    과학동아천문대페이스북
  • 어과동TV
    어과동TV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