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시작된 ‘사회에 책임지는 과학기술’

2017년 03월 23일 18:02

※편집자 주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과학기술 혁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그중에는 시민들이 평소 겪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과학기술을 개발하자는 논의도 있습니다. 동아사이언스는 전문가 기고를 통해 최근 대학과 정부출연연구기관, 해외 과학기술계 등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사회문제해결형 과학기술’과 이를 위한 거버넌스 정책제안을 4차례에 걸쳐 소개합니다.

 

필자 성지은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연구위원 - 성지은 연구위원 제공
필자 성지은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연구위원

사회문제해결형 과학기술 거버넌스 제안 ③해외사례
글 : 성지은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연구위원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이 변하고 있다. 경제성장을 위한 도구에서 벗어나 넓은 의미의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도구로 봐야 한다는 시각이 널리 확대되고 있다. 유럽은 ‘사회에 책임지는 연구·혁신(RRI, Responsible Research and Innovation)’ 개념을 도입했다. 연구개발의 수요자를 산업에서 사회로 이동시키며, 연구개발의 사회적 책임성과 연구개발 과정에의 시민참여를 강조하는 개념이다. RRI는 기술진보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으면서 기술혁신의 부정적 영향에 대한 거버넌스를 갖추려는 노력이다.


●시민·이해당사자가 논의 참여한 ‘스파이스 프로젝트’


‘설국열차’라는 영화가 있다. 기상 이변으로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지구를 기차 한 대가 궤적을 따라 끝없이 달린다. 영화에는 지구온난화의 유일한 해결책으로 채택된 CW-7 가스 살포로 인해 지상의 모든 것이 얼어붙는 빙하기가 시작되었다는 내용의 인트로가 나온다. 지구를 구할 것으로 믿었던 기술이 지구에 재앙을 초래하여 인류가 멸망한 것이다.

 
영화 속 CW-7 가스와 비슷한 기술은 현실에도 있다. 영국연구위원회는 지구 성층권에 수증기와 같은 특정입자를 주입해 기후 변화를 완화시키려는 시도가 공학적으로 실현가능한 것인지를 연구하는 스파이스(SPICE) 프로젝트를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지원했다. 스파이스 연구팀은 1km 높이의 호스를 커다란 풍선에 달아 입자를 분사하는 계획을 세웠다.

 

대기 중에 입자를 뿌려 태양빛을 반사시킴으로써 지표면 온도를 낮추려 시도한 SPICE(Stratospheric Particle Injection for Climate Engineering) 프로젝트 - 위키미디어(Hughhunt) 제공
대기 중에 입자를 뿌려 태양빛을 반사시킴으로써 지표면 온도를 낮추려 시도한 SPICE(Stratospheric Particle Injection for Climate Engineering) 프로젝트 - 위키미디어(Hughhunt) 제공

이 연구를 두고 과학자 등 찬성론자들은 지구공학적 실험이 사람이나 자연에는 아무런 해가 없으며, 온난화를 늦추는 안전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환경단체들은 지구공학이 환경에 부정적 영향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고 온실가스 방출 감축을 위한 지구적인 노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게다가 한 국가가 전 지구 기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실험을 할 수 있는가라는 정치적·윤리적 문제도 제기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영국연구위원회는 대중과의 소통을 통한 사회적 합의를 시도했으며, 다섯 단계에 걸쳐 과제를 평가했다. 각 단계마다 평가단은 연구진에게 연구의 목적과 잠재적 영향에 대해 예견하고 성찰했는지, 그리고 일반시민과 이해당사자들과 함께 숙의했는지를 묻고 평가해 연구의 지속 여부를 결정했다. 평가단에는 두 명의 RRI 연구자를 포함한 사회과학자, 시민단체대표자, 대기과학자, 항공공학자가 포함됐다.


●“이 연구에 대해 시민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평가단은 1단계(연구의 안전성 확인)와 2단계(규제준수 여부 확인)는 무난히 통과시켰다. 하지만 3~5단계에선 기준을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이 기준을 만족시킬 때까지 실험을 잠정적으로 연기할 것을 권고했다(표 참조).


3~5단계 평가는 우리가 주목해서 볼 만하다. 3단계 평가기준은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프로젝트의 목적과 성격에 대해 명확하게 의사소통하고 이에 대한 균형 잡힌 토의를 장려했는지 여부다. 4단계 기준은 프로젝트가 미래에 어떻게 이용되고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와 새로운 정보가 나타날 때 이를 재평가하는 메커니즘이 갖춰졌는지 여부다. 5단계 기준은 이 프로젝트의 영향에 대해 일반시민과 이해당사자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갖춰졌는지 여부다.


2012년 5월 스파이스 연구진은 이해관계자 참여와 사회적·윤리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평가단의 권고를 받아들여 1km 테스트베드 실험을 실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스파이스 프로젝트 단계평가]자료: Stilgoe, J. et al.(2013), "Developing a framework for responsible innovation", Research Policy, 42(9).

자료: Stilgoe, J. et al.(2013), "Developing a framework for responsible innovation", Research Policy, 42(9).

최근 RRI는 개별 프로그램 단위를 넘어 기관 단위의 사업으로 발전하고 있다. 영국에서 가장 큰 공공 연구비 지원기관 중 하나인 영국공학·물리과학연구위원회는 2013년 10월 RRI를 자신의 연구지원 정책에 포함시킬 것을 공식선언했다. 연구비 심사과정에 RRI를 중요한 기준으로 포함시켜 성찰, 예견, 숙의/포괄성, 책임 같은 RRI의 핵심측면이 잘 통합된 연구를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미국도 국가나노기술발전계획 등을 세울 때 RRI를 포함시키는 등 이런 분위기는 전 세계로 확산되는 추세다.

 

‘더 나은 사회’, ‘삶의 질 향상’, ‘사회문제 해결’이라는 유럽 RRI의 모토는 과학연구와 기술혁신의 생산적 힘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으며, 새로운 혁신의 장을 여는 동시에 과학기술이 사회에 미칠 수 있는 부작용을 성찰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사회와 함께하는 과학’을 향해 과학기술혁신 패러다임을 새롭게 모색하는 단계에 있는 우리나라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연속기고]사회문제해결형 과학기술 거버넌스 제안

①대학 / “대학 거버넌스, 학생-교수가 사회문제해결 주체될 수 있게 변화해야”
②출연연 / 산업지원에서 공공기술로…출연연이 변하고 있다

④거버넌스 제안 / “과학기술에 시민이 참여하는 새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필자 소개
성지은 박사 / 고려대에서 행정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과학기술정책연구원에서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주요 연구분야는 과학기술혁신 거버넌스, 통합형 혁신정책, 탈추격 혁신 등이다.  jeseong@step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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