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에서 ‘과학기술’이 ‘국민경제’와 헤어질 수 있을까?

2017년 03월 03일 19:00

 

2월 22일 국회에서 열린 ‘과학기술 헌법개정을 위한 정책토론회’에서 노환진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교수가 발표하는 모습. - 변지민 기자 제공
2월 22일 국회에서 열린 ‘과학기술 헌법개정을 위한 정책토론회’에서 노환진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교수가 발표하는 모습. - 변지민 기자 제공

‘과학기술 헌법개정을 위한 정책토론회’가 2월 22일 국회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열렸다. 헌법의 과학기술 조항을 왜 바꾸려 하는지, 실현 가능한지 등 4가지 질문으로 토론회 내용을 정리했다.


1. 왜 헌법에서 과학기술 조항을 바꾸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나?

과학기술계 일각에서 나오는 헌법개정 목소리는 ‘정부와 사회에서 과학기술을 경제발전의 수단으로만 인식하고 있다’는 오래된 불만때문이다.

 

만일 헌법에서 과학기술을 새롭게 정의한다면, 국민들의 인식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깔려있다.


과학기술이 헌법에서 처음 언급된 것은 1962년부터다. 이후 ‘국민경제’라는 단어와 ‘커플’처럼  붙어 다녔다. ‘국민경제의 발전과 이를 위한 과학진흥(1962년 5차 개정헌법)’. ‘국민경제의 발전과 이를 위한 과학기술(1972년 7차 개정헌법)’. 여러 차례 개정을 거친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래는 1987년부터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9차 개정헌법이다.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9장 ‘경제’ 중 제127조 제①항)

 

“지금까지 과학기술 담당 행정부처는 경제부처에 배속됐고, 연구기관이나 연구사업에 대한 주요정책은 경제장관회의에서 다뤄졌습니다. 각 부처에서 운영하는 국가연구개발사업이 경제논리로 시행되는 이유가 바로 이 규정 때문입니다. 심지어 정부출연연구기관이 공기업처럼 관리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노환진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교수는 ‘국민경제를 위한 과학기술’이 불러온 부작용을 이렇게 설명했다.


노 교수는 “경제논리가 적용되는 평가체계 때문에 과학기술자들이 과감한 연구주제에 도전하지 못하고 위험성이 적은 주제에 매달리게 된다”고 지적했다.


박기주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연구원은 “과거 우리 정부는 하루빨리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고자 하는 국민의 의사를 반영해 (산업화를 위한) 과학기술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역설했다”면서도 “제한된 기간 내에 낙후된 해당 분야를 급속히 발전시키기에 좋은 수단이기는 했으나, 목표가 달성돼 존재의의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박 연구원은 “이제 더 이상 과학기술과 관련된 국가의 역할을 경제 분야로 한정해선 안 된다”며 “최근 자연과 사회의 재발견과 사회 진보를 위한 과학기술의 긍정적 역할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성찰이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2. 헌법 속 과학기술 규정, 어떻게 바꿔야 할까?


현행 헌법을 고쳐야 한다는 데 동의하는 과학기술자는 많지만, 제시하는 개정방향은 다르다. 헌법에 들어갈 새로운 문구를 정하기 위해 길고 긴 논의가 이어질 것을 예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노환진 교수는 “국가혁신체계 구축과 국가인적자원개발에 방점을 두었으면 좋겠다”면서 다음과 같은 조항을 헌법개정안의 예로 들었다.


헌법 제127조 ①항 국가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국가의 자주적 위상과 국민의 복리에 기초적 역할을 하도록 유연하고 효율적인 국가혁신체계를 구축하여야 한다.
②항 국가는 제1항에서 규정한 국가혁신체계 내에서 다양한 전문가들이 자유롭고 개방적으로 능력을 함양하고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국가인적자원개발을 적극 추진하여야 한다.


한편 박기주 연구원은 “과학기술의 사회적 의미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개정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은 조항을 헌법개정안의 예로 들었다.


헌법 제127조 ①항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과학기술의 발전과 조화되는 사회를 추구한다.


반면 이덕환 서강대 교수는 “과학기술이 경제성장의 중요한 수단인 것도 사실”이라며 헌법 제127조를 고치는 대신 다른 조항을 추가하자고 제안했다. 이 교수는 “비판적 합리성, 개방성, 민주성 등 과학기술이 가진 본질을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으로 삼자는 내용을 헌법에 포함시키자”고 주장했다.  


3. 다른 나라의 헌법에선 과학기술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을까?


과학기술 분야를 헌법에서 독립적으로 다룬 국가는 많지 않다. 해외사례를 조사한 김선화 국회 입법조사처 정치의회팀 입법조사관은 드물게 헌법에 과학기술조항을 넣은 필리핀, 스위스, 스페인, 케냐, 중국의 사례를 소개했다.


우선 필리핀 헌법 제18장 제3조 제2항에 이런 내용이 있다. ‘모든 교육기관은 애국심과 민족의식을 심어주고…(중략)…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사고를 장려하며 과학적 및 기술적 지식을 넓히고 직업적 능률을 높인다.’


스위스 헌법 제64조 ‘연구’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제1항 연방은 과학 연구 및 혁신을 진흥한다. 제2항 연방은 과학연구 및 혁신의 질적 보증 및 조정 보장을 조건부로 그 지원을 할 수 있다. 제3항 연방은 연구소들을 설치, 인수 및 운영할 수 있다.’


스페인 헌법 제149조 제1항은 국가의 배타적 권한사항을 정하면서 32개 항목을 열거하고 있는데 그중 15호에 ‘과학 및 기술 연구의 장려 및 일반적 조정’을 정하고 있다.


케냐 헌법 제2장 ‘공화국’ 제11조에는 ‘국가는 문학, 예술, 전통의례, 과학, 통신, 정보, 매스컴, 발간물, 도서관 및 기타 문화적 유산 등의 모든 표현 형태를 증진시킨다’는 내용이 담겨있고, ‘과학과 고유의 기술이 국가발전에 미치는 영향을 인지해야 하며 케냐국민의 지적재산권을 증진시켜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중국 헌법 제1장 총강의 제19조에는 ‘국가는 사회주의 교육사업을 발전시키고 전국 인민의 과학·문화수준을 높인다’는 표현이 담겨있다. 제20조에선 ‘국가는 자연과학 및 사회과학 사업을 발전시키고 과학지식 및 기술지식을 보급해 과학연구의 성과와 개발 및 창조를 장려한다’며 국가의 역할을 정하고 있다. 


공통적으로 헌법에서 과학기술이 ‘지식’이나 ‘교육’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등장하며, 국가의 역할로 언급되고 있다. 김 조사관은 “이들 나라에선 과학기술이 최소한 경제에 종속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지식 그 자체로 이해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4. 헌법에서 과학기술 조항을 실제로 바꿀 수 있을까?


통치구조 변화에서 시작된 개헌논의가 다른 영역으로도 확산되고 잇다. 과학기술조항 헌법개정 논의에 가장 앞장서고 있는 곳은 국민의당이다. 국회 헌법개정특위 제1소위원장인 김동철 국민의당 의원은 “현행 헌법의 과학기술 조항은 너무 협소하게 규정돼 있다”며 변화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


국민의당 손학규 전 의원도 “과학기술이 삶의 질 향상, 인류의 행복, 문명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지 심각하게 고려해봐야 한다”며 “이를 좀더 적극적으로 다룰 수 있도록 헌법적인 기초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미옥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월 6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헌법의 과학기술조항을 어떻게 바꾸면 좋을지’ 과학자들에게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그동안 과학기술계에서만 논의돼 왔던 개헌의 필요성이 이제 정치권으로도 확산된 것이다.

  

첫줄 오른쪽부터 권석민 미래창조과학부 과학기술전략본부 과장, 노환진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교수, 이은우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사무총장. 둘째줄 오른쪽부터 김선화 국회 입법조사처 정치의회팀 입법조사관, 이덕환 서강대 교수, 둘째줄 왼쪽 첫 번째 박기주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연구원, 세 번째 고문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  - 신용현 의원실 제공
첫줄 오른쪽부터 권석민 미래창조과학부 과학기술전략본부 과장, 노환진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교수, 이은우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사무총장. 둘째줄 오른쪽부터 김선화 국회 입법조사처 정치의회팀 입법조사관, 이덕환 서강대 교수, 둘째줄 왼쪽 첫 번째 박기주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연구원, 세 번째 고문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  - 신용현 의원실 제공

토론회는 신용현 국민의당 의원이 주최하고 국민정책연구원이 주관했다. 노환진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교수와 박기주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연구원이 현행 과학기술 관련 헌법조항의 지위와 한계, 역사적 맥락, 개정방향 등을 발표했다. 발표 뒤에는 토론이 진행됐는데,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자문위원인 고문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가 좌장을 맡고 이은우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사무총장, 이덕환 서강대 교수, 조황희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선임연구위원, 권석민 미래창조과학부 과학기술전략본부 과장, 김선화 국회 입법조사처 정치의회팀 입법조사관 등이 참석했다.

 


변지민 기자

her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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