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의 과학카페] 털과 땀샘의 음양이론

2017년 02월 07일 14:00

 

GIB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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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시절 ‘분자진화학’이라는 과목을 들었다. 수업 내용은 다 잊어버렸지만 어느 날 교수님이 한 말씀은 기억이 선명하다. 학생들이 연구 관련 분야의 최신 논문은 열심히 읽는데 자칫 숲은 못 보고 나무만 보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숲을 보는 방법으로 1년에 한 번 교양 생물학 교재를 통독하라고 권했다. 이렇게 생물학 전반을 훑어보면 자신의 연구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고 뜻밖의 통찰을 얻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과학기자가 된 뒤 이 조언을 ‘확대 적용해’ 여러 분야의 학부 교재를 샀다. 시간 날 때 통독하려던 원래 의도가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최신 연구 결과를 기사로 다룰 때 먼저 교재에서 관련 부분을 읽어보고 나서 접근하니 확실히 이해의 폭이 넓어진 것 같았다. 교수님이 조언을 한 그날 실험을 핑계로 수업을 빼먹었다면 지금 필자의 작업 방식은 꽤 달랐을 것이다.

 

태아의 발생과정에서 피부에 부속된 기관의 형태형성이 음양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BMP신호가 활성화되면(빨간색) 땀샘(포유류)이나 비늘(조류)이 되고 억제되면(파란색) 털이나 깃털이 된다. - K. Sutliff/‘사이언스’ 제공
태아의 발생과정에서 피부에 부속된 기관의 형태형성이 음양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BMP신호가 활성화되면(빨간색) 땀샘(포유류)이나 비늘(조류)이 되고 억제되면(파란색) 털이나 깃털이 된다. - K. Sutliff/‘사이언스’ 제공

털에 있어서 인간은 별종 포유류


체계적으로 정리된 교재를 읽는 것만은 못하겠지만 한 주제를 폭넓게 다룬 교양과학책을 읽는 것도 숲을 보는데 도움이 된다. 지난주 읽은 ‘헤어(Hair)’라는 책도 그런 경우다. 30여 년 동안 털을 연구해온 피부학자 커트 스텐은 이 책에서 털의 과학과 문화사 등 다양한 측면을 서술했다. 털에 관련해 에세이를 몇 편 쓴 필자는 나름 털을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책을 읽으며 그 지식이 얼마나 단편적이었는가를 깨달았다.


책의 1장 ‘최초의 털’에서는 털의 구조와 기능, 진화를 다루고 있다. 특히 털의 단열 효과를 설명하는 부분이 흥미로운데, 포유류 대다수는 털이 너무 조밀해 그 사이에 갇힌 공기가 순환이 안 돼 체온 조절이 구조적으로 어렵다고 한다. 따라서 털이 무성한 피부에는 땀샘이 없다. 땀을 흘려봐야 빽빽한 털들의 틈에 갇혀 제대로 증발이 안 돼 체온 조절에 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간이 단열이 잘 되는 털외투를 계속 착용했다면 진화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며 “약 100만~300만 년 전 영장류(인류의 조상)의 뇌가 커지기 시작할 때 털이 빠지고 외분비샘(땀샘)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털 없는 원숭이’라는 제목의 책도 있듯이 모피가 사라지고 땀샘이 생긴 게 인류 진화의 원동력임은 알고 있었지만 둘이 맞물린 현상이라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필자는 이 부분을 읽는 순간 ‘앗, 그거였나!’하는 깨달음에 책장을 뒤적거렸다.


학술지 ‘사이언스’ 2016년 12월 23일자에는 발생과정에서 털과 땀샘의 형태 형성이 음양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분자 차원에서 밝힌 논문이 실렸다. 당시 2016년 타계한 과학자들에 대한 글(‘과학은 길고 인생은 짧다’)을 쓰느라 바빴던 필자는 목차만 훑어보고 지나쳤는데 책을 읽다 새삼 그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이다.


실험은 꽤 복잡한데 (논문 분량이 12쪽이나 된다) 연구 내용을 요약하면 털과 땀샘이 상호 배제의 관계라는 것이다. 즉 원래 털이 날 피부에서 털이 생기는 신호를 억제하면 땀샘이 생기고 땀샘이 생길 자리에서 그 신호를 억제하면 털이 생긴다는 것이다. 사실 두 신호는 동전의 양면으로 신호가 있으면 땀샘, 없으면 털이 된다. 따라서 신호의 관점에서는 털이 음(陰), 땀샘이 양(陽)이고 형태의 관점에서는 털이 양(돌출됐으므로), 땀샘이 음이다.


미국 록펠러대의 연구자들은 생쥐를 대상으로 이런 관계를 밝혀냈다. 대부분의 포유류처럼 생쥐도 피부에서 털이 나는 부분은 땀샘이 없고 땀샘이 있는 부분은 털이 없다. 연구자들은 생쥐의 발생과정에서 등 (털만 있는 피부)과 발바닥 (땀샘만 있는 피부)이 되는 부분의 유전자 발현 패턴을 비교분석했다. 그 결과 BMP라는 단백질 (성장인자)을 지정하는 유전자군에서 차이가 있었고 특히 BMP5가 두드러졌다. 즉 BMP5 농도가 높은 피부에서는 땀샘이 생기고 낮은 피부에서는 모낭이 형성됐다. 추가 연구 결과 BMP가 SHH라는 형태 형성 단백질의 생성을 억제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피부에서 SHH가 없으면 땀샘이 생기고 있으면 털이 나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여기에 ‘BMP:SHH 길항작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흥미롭게도 생쥐의 발생과정에서 털이나 땀샘의 생성을 지정하는 신호분자가 작용하는 기간이 정해져 있다. 즉 등 피부의 경우 수정 뒤 14일 무렵에 모낭이 형성되고 발바닥 피부의 경우 수정 뒤 17일 부근에 땀샘이 형성된다. 따라서 이 시기 이전에 등 피부에 BMP가 많이 발현되게 하면 모낭 대신 땀샘이 생기고 발바닥 피부에서 BMP를 억제하면 땀샘 대신 모낭이 형성된다. 반면 이 시기를 지난 뒤에는 이런 상황을 유도해도 소용이 없다. 결국 생쥐의 경우 공간에 따른 유전자 발현 차이로 털이 나는 피부와 땀샘이 있는 피부가 구분되는 것이다. 이는 다른 대부분의 포유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생후 5일차의 생쥐 발바닥 피부의 단면사진이다. 위는 정상 생쥐로 땀샘(SwG) 형태가 보이고 땀샘에서 발현하는 유전자인 SMA가 예상대로 많이 발현돼 있다(맨 왼쪽 사진에서 빨간색). 아래는 BMP신호를 전달하는 유전자가 고장 난 생쥐로 땀샘 대신 모낭(HF) 형태가 보이고 모낭에서 발현하는 K17 유전자의 발현량(왼쪽에서 세 번째 사진에서 빨간색)과 LHX2 유전자의 발현량(맨 오른쪽 사진에서 빨간색)이 많다. - 사이언스 제공
생후 5일차의 생쥐 발바닥 피부의 단면사진이다. 위는 정상 생쥐로 땀샘(SwG) 형태가 보이고 땀샘에서 발현하는 유전자인 SMA가 예상대로 많이 발현돼 있다(맨 왼쪽 사진에서 빨간색). 아래는 BMP신호를 전달하는 유전자가 고장난 생쥐로 땀샘 대신 모낭(HF) 형태가 보이고 모낭에서 발현하는 K17 유전자의 발현량(왼쪽에서 세 번째 사진에서 빨간색)과 LHX2 유전자의 발현량(맨 오른쪽 사진에서 빨간색)이 많다. - 사이언스 제공

생쥐는 공간, 사람은 시공간 조절


이 지점에서 예리한 지성을 지닌 독자는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사람의 피부에는 털과 땀샘이 뒤섞여 분포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 손발바닥이나 입술처럼 땀샘만 있는 피부는 있지만 생쥐의 등처럼 털만 있는 부분은 없다. 매운 걸 먹으면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땀방울이 송송 맺히는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실험 결과는 인류의 털과 땀샘 진화를 이해하는데 별 도움이 안 되는 것일까.


물론 연구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으면 연구의 영향력이 반감되기 마련이다). 기본 원리는 그대로 유지되지만 사람에서는 태아의 발생과정에서 유전자 발현이 공간의 차원뿐 아니라 시간의 차원에서도 변화하면서 털과 땀샘을 동시에 지니는 피부가 진화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의 두피를 보면 임신 15주차 무렵에는 BMP가 억제돼 모낭이 형성되는 발생 과정이 진행된다. 그러다 17주차 무렵이 되면 BMP 발현이 늘어나면서 땀샘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20주차에 이르면 땀샘은 계속 형성되는 반면 새로운 모낭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다. 즉 사람의 피부에서는 털이 생기다말고 땀샘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람의 피부에는 털과 땀샘이 뒤섞여 있다.


필자는 2013년 학술지 ‘셀’에 소개된 한 논문을 소재로 에세이를 쓴 적이 있다. 동아시아인들은 EDAR이라는 유전자의 특정 변이형을 지닌 비율이 높은데 이런 사람들은 땀샘의 밀도가 높아 땀을 많이 흘린다는 것이다. EDAR은 BMP:SHH 신호전달 과정에 관여하는 수용체 단백질이다. 당시 저자들은 이런 특성이 수만 년 전 동아시아 기후가 고온다습해 그에 대한 적응으로 진화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동아시아 사람들의 털 밀도는 서구나 아프리카 사람들에 비해 낮다고 한다. 그때는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자연스런 결과다.


예전에 서구의 한 여성이 동아시아 남자들은 몸에 털이 없어 남자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는데, 이런 연구 결과를 들려주면 생각이 좀 바뀔지 문득 궁금해진다.


 

※ 필자소개
강석기. 서울대 화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지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4권, 2012~2015),『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2014)가 있고, 옮긴 책으로 『반물질』(2013), 『가슴이야기』(201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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