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시선 50] ‘설날’ 생각

2017년 01월 28일 18:00

‘(낯)설다’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코앞이다. 지구가 태양 둘레를 한 바퀴 돌아서 새해가 찾아온 지는 한 달가량 지났지만, 달이 지구를 열두 바퀴쯤 돌아 찾아온 설은 곧 도착할 테다. 그렇게 태양을 빙 둘러온 새해는 이미 와 있고, ‘설’은 달의 운행에 맞춰 이제 막 당도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곧 세배를 마친 아침부터 둘러앉아 노란 고명으로 꽃 핀 떡국을 먹을 테다. 떡국에 뜬 낮달 같은 복(福)을 숟가락으로 분주히 날라 그믐 같은 배를 채우고 기꺼이 나이 한 살도 더 먹을 것이다.

 

GIB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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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설과 함께 아이들은 성장하고 노인들은 늙어간다. 지구가 태양 둘레를, 달이 지구 둘레를 여전히 달리고 있으니 말이다. 지구가 아득한 과거부터 자전과 공전을 해온 동안, 한때는 아이였던 나도 설날 놀이로 또래들과 함께 팽이를 던졌다. 팽이 끈의 마찰력을 높이려고 팽이 경사면에 침을 묻혀가며 친친 감은 팽이를 바닥을 향해 날릴 때의 쾌감이란! 그것은 손맛이었고 그 손끝에서 풀린 팽이 끈이 팽이를 회전시켰다. 그리고 지켜보았다, 내 손을 떠나 저 혼자 바닥에서 돌고 있는 팽이를. 잘 착지해 수직으로 돌고 있는 팽이는 한자리를 고집했고 그렇지 않은 팽이는 행성처럼 주위 공간을 에두르며 비스듬히 회전했다. 그렇게 매번 다른 힘의 작용에 팽이들은 제각각 돌았고 또 그 우연성이 그 놀이의 재미였다.


모든 놀이의 즐거움은 우연성에 있다. ‘우연’의 경우의 수가 복잡하게 얽혀 있을수록 놀이는 흥미와 긴장감을 높여준다. 일가식솔이 모였을 때 함께할 설 명절놀이로는 윷놀이가 안성맞춤이다. 남녀노소가 인원 제한 없이 집 안이든 마당이든 윷가락과 말판만 있으면 함께할 수 있는 놀이이기 때문이다. 작전을 위한 의결 과정도 재미있거니와 그 결과가 서로 맞물려 예측할 수 없는 승패가 엎치락뒤치락하는 동안 참가자의 성격까지 고스란히 드러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이처럼 설에는 두루 모여 웃고 떠들며 시끌벅적해야 명절답다.


그렇게 엔도르핀 호르몬으로 심신을 헹구고 나면 놀 일이 하나 더 있다. 내 기억 속에서 겹치는 유년의 그날, 세뱃돈으로 받은 빳빳한 천 원짜리 지폐를 들고 흐뭇했던 내가 찾아간 곳은 초등학교 앞 문방구였다. 설날이라 대부분은 문을 닫았지만 유독 한 곳만은 평소대로 가게 앞까지 형형색색으로 유혹하는 물품들을 진열해놓았다. 설 세찬(歲饌)으로 이미 배는 불렀지만 쫀드기 같은 불량식품을 질겅질겅 씹으며 나는 태극 문양이 그려진 하얀 종이 방패연을 사 들고 오르막 중턱에 자리한 학교 운동장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챙겨 간 얼레에 연결해 플라타너스 고목보다 훨씬 높게 연줄을 풀어내며 우리 집 방향의 아랫동네 창공에 연을 띄웠다.

 

GIB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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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그저 바람을 낚으려는 듯 얼레를 돌리며 연줄을 풀고 당길 때 느껴지는 손맛이 좋아 한동안 바람을 등지고 오래 서 있었지만, 우리 조상들은 섣달그믐 즈음부터 정월 대보름까지 복된 새해를 기원하는 마음을 실어 연(鳶)을 날렸다. 정월 대보름까지는 계속 달이 차오르고 그 후로는 다시 달빛이 작아지기에 보름이 지나서 연을 띄우면 오히려 액운을 맞는다고 여겼단다. 그래서 보름까지만 연을 띄웠는데 그 절정인 대보름날의 연을 액연(厄鳶)이라고 불렀단다. 그 액연의 꼬리나 몸통에 송액(送厄) 혹은 송액영복((送厄迎福)이라고 쓰고는 얼레를 끝까지 풀어내고 연줄을 끊음으로써 연과 함께 액운을 멀리멀리 날려 보냈단다.


현실의 고난과 미래의 불안을 잘 모르는 아이가 어찌 어른들이 띄우는 액연(厄鳶)의 의미를 알랴만, 연을 띄울 때마다 유년의 나는 손맛의 반복 뒤에 남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적요함과 허무함을 느꼈다. 얼레에서 서서히 풀려나 내게서 점점 멀어지는 연이 창공에서 홀로 바람에 맞서고 있을 때는 묘한 비장함과 막연한 연민도 느꼈다. 그러고 보면 지구라는 행성도 우주에 떠 있는 한 점의 푸른 연(鳶)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곳에서 우리의 인생 하루하루가 희로애락이듯 특별한 날인 설에도 세상 사람들의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이 뒤섞인 지구는 4색의 팽이처럼 내내 돌고 있는 것일 테다.

 

※ 필자 소개

윤병무. 시인. 시집으로 ‘5분의 추억’과  ‘고단’이 있으며, 동아사이언스 [생활의 시선]을 연재하고 있다.

 

※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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