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의 맥주생활 (17)] 수도원에서 만드는 성스러운 술, ‘트라피스트 맥주’

2017.01.13 17:00

지난 여름 어느 야심한 밤 H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들어왔습니다. 내일 뵙죠.” 상대는 무심한듯 시크하게 한 마디를 남긴다. 첫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녀 마냥 쿵쾅대는 H의 심장. 그분이 드디어 오셨구나….


다음날 어둠이 짙게 깔린 저녁 무렵 한 자리에 모인 사람들. 테이블 가운데에는 참기름병처럼 생긴 정체를 알 수 없는 갈색병들이 도열해있다. 신을 영접하는 광신도들처럼 모두 한껏 상기돼 있다. 드디어 노란 병뚜껑이 열리고 검은 액체가 납작한 잔에 따라진다. 적막만이 가득 찬 공간.


잔을 하나씩 집어 든 순간, 다른 세계의 문이 열린 듯 갑자기 사람들의 말문이 트인다. “와, 역시 세계 최고의 맥주답네요.” “벨기에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맥주였는데 한국에서 수입된 베스트블레테렌12(Westvlenteren12)를 만나다니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이번에 못 마시면 또 언제 마셔볼지 몰라 무리해서 왔어요.”

 

베스트블레테렌12 - 베스트블레테렌코리아 제공
베스트블레테렌12 - 베스트블레테렌코리아 제공

유명 맥주 평가 사이트에서 장기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벨기에 맥주 ‘베스트블레테렌12’. 맛과 품질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데에 누구도 이견을 제기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점 말고도 베스트블레테렌12의 명성을 만든 요인이 더 있다. 그 중 하나는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수도원에서 한땀한땀 기도하는 마음으로 만든 수도원 맥주, 즉 ‘트라피스트 맥주(Trappist Beer)’라는 점이다.


트라피스트 맥주는 카톨릭 수도회 중 하나로 엄격한 규율이 특징인 트라피스트 수도회에서 만들어진 맥주다. 즉 수도원 맥주와 트라피스트 맥주는 같은 의미가 아니고 많은 수도원 맥주 중 특정 수도원의 맥주가 바로 트라피스트 맥주다. 중세시대 수도원에서는 금식 기간에 열량을 보충하기 위해서나 오염된 식수를 피하기 위해 맥주를 만들었고 수도원의 재정을 충당할 목적으로 외부 판매도 이뤄졌다.


그러나 단순히 트라피스트회 계열 수도원에서 만들었다고 트라피스트 맥주라는 말을 쓰면 ‘철컹철컹’ 잡혀간다. 트라피스트 맥주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면서 일반 양조장들이 수도원 맥주를 사칭하자 1997년 8곳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이 ‘국제 트라피스트 협회(International Trappist Association)’를 창설해 명칭 사용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 170곳 이상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이 있지만, 2017년 1월 현재 단 12곳만 트라피스트라는 타이틀을 달고 맥주, 치즈, 빵, 비스킷, 초콜릿 등을 판매할 수 있다. ‘유기농 인증’이나 ‘위해요소중점관리우수식품(HACCP)’ 인증처럼 수도사들이 잘 만든 제품이라는 인증인 셈이다.


트라피스트 맥주는 벨기에에 6개(아헬(Achel), 시메이(Chimay), 오르발(Orval), 로슈포르(Rochefort), 베스트말레(Westmalle), 베스트블레테렌(Westvleteren))가 있고 네덜란드에 2개(라 트라프(La trappe), 준데르트(Zundert)), 오스트리아(엥겔스첼(Engelszell)), 미국(스펜서(Spencer), 이탈리아(트레 폰타네(Tre Fontane), 프랑스(몽 데 카(Mont des Cats))에 각각 1개씩 있다.

 

트라피스트 인증 로고 - 국제트라피스트협회 제공
트라피스트 인증 로고 - 국제트라피스트협회 제공

트라피스트 맥주는 ‘Authentic Trappist Product’라고 써 있는 육각형의 로고를 쓸 수 있다. 이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수도원 안에 양조장이 있어야 하고, 수도사 감독 아래 맥주가 양조돼야 한다’ ‘양조를 통한 수입은 수도사의 생활비, 수도원 운영 등에 충당하며 그 외의 수익은 반드시 자선 목적으로 기부해야 한다’는 등의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성스러운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엄격, 진지, 단호하게 만든 맥주라는 것만으로 신비로운 매력을뿜어내는데 생산량이 많지 않은 데다, 더욱이 소수의 수도원만 인증을 받아 판매를 하다 보니 트라피스트 맥주가 ‘레어아이템’이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 중에서도 베스트블레테렌을 만드는 세인트 식스투스 수도원은 규모가 작아 더 귀한 맥주가 된 것이다.

 

베스트블레테렌코리아 제공
베스트블레테렌코리아 제공

트라피스트 맥주는 다양한 색깔과 향, 맛으로 양조된다. ‘두벨’(Dubbel), ‘트리펠’(Trippel), 쿼드루펠(Quadrupel)로 크게 나뉘는데 영어로 표현하면 각각 더블, 트리플, 쿼드러플이 된다. 두 배, 세 배, 네 배라는 의미에 맞게 일반 맥주보다 도수가 높다.


두벨의 경우 도수 7% 정도가 일반적이고 갈색이나 붉은색이 감도는 검은색이다. 견과류와 어두운색 말린 과일, 캐러멜, 크래커맛 등을 기대할 수 있다. 트리펠은 도수 8~9% 정도로 황금색을 띄고 열대과일, 꽃향기 등이 강하다. 높은 도수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게 넘어간다. 


쿼드루펠은 칠흑 같은 검은색으로 10%가 넘어가는 맥주도 많다. 와인처럼 마실 수 있는 진하고 풍부한 맛이다. 

 

시메이(좌)와 오르발(우) - 시메이 양조장, 오르발 양조장 제공
시메이(좌)와 오르발(우) - 시메이 양조장, 오르발 양조장 제공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트라피스트 맥주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시중 대형 마트에서도 시메이, 오르발, 로슈포르 등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베스트블레테렌 등도 간간이 수입이 돼 일부 펍이나 바틀샵을 통해 유통되기도 한다.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만든 맥주 외에도 일반 양조장들이 수도원 맥주 스타일로 만든 맥주도 많다. 이들 맥주는 애비 맥주(Abbey Ale)로 분류된다. 


이번 명절에는 가까운 분들에게 수도사들이 영적 기운을 담아 만든 맥주를 선물해야겠다. 좋은 일들만 생기라고 나도 좀 마셔야지. 새해에는 숙취 없이 많이 마시게 해주세요….

 


<’1일 1맥’ 추천맥주>

베스트블레테렌포세일 제공
베스트블레테렌포세일 제공

이름 : 세인트 버나두스 앱스12(St. Bernardus abt 12)
도수 : 10.0%


공인 받은 트라피스트 맥주는 아니지만 ‘준 트라피스트 맥주라고 할 수 있다. 이 맥주를 만든 세인트 버나두스 양조장은 지난 1992년까지 46년 동안 세인트 식스투스 수도원 대신 베스트브레테렌12를 생산했다. 세인트 버나두스 앱스12는 여전히 베스트브레테렌12의 레시피로 만들고 있다고 하니 세계 최고 맥주의 맛을 이 맥주에서 느껴볼 수 있겠다.


세인트 버나두스 앱스12는 쿼드루펠 스타일로 복잡한 과일향과 커피, 초콜릿, 캐러멜의 맛을 풍부하게 즐길 수 있다. 앱스는 네덜란드어로 수도원장을 의미한다.

 

 

※ 필자소개
황지혜. 비어포스트 에디터, 전 매일경제신문 기자. 폭탄주와 함께 청춘을 보내다 이제는 돌아와 수제 맥주 앞에 선 한량한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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