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의 맥주생활 (14)] 꽃이 내게 와 맥주가 되었다

2016.12.23 17:00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꽃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맥주가 되었다.’


22년 만에 찾아온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지난 8월. 밖에 나가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줄줄 흐르고숨이 턱턱 막히는 미친 더위가 연일 이어진다. H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아무것도 하기 싫다. 아니 할 수가 없다. 노트북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만으로도 절로 화가 솟구친다.


누워서 뒹굴뒹굴 마우스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맥주동호회 카페에서 홉(Hop) 수확 행사를 발굴한다. 국내 중소 맥주 양조장에서 지원자를 모아 키우던 홉을 따고 맥주도 딴다고… 작년 행사에 참여한 사람이 올린 ‘사탕수수 밭에 팔려온 노예처럼 일했다’는 후기가 마음에 걸리지만, 맥주 4대 재료 중 하나를 수확해 볼 기회는 여간해서는 오지 않을 것 같다.


맥주에 들어가는 홉은 운송과 보관의 편의를 위해 대부분 사료처럼 생긴 펠릿(Pellet) 형태로 압축돼 유통되기 때문에 H는 아직 생 홉을 실제로 본 적이 없다.


폭염 따위가 대수랴. H의 영혼을 달래주는 맥주 맛을 만들어주시는 홉님을 영접하러 한번 몸을 일으켜 보자. 경기도 청평으로 달려간다.

 

 

맥주 거품 위의 홉 - 더핸드앤몰트 제공
맥주 거품 위의 홉 - 더핸드앤몰트 제공

청평역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7시. 차로 10분여를 이동해 도착한 홉 농장은 이른 아침의 선선함과 함께 눈부실 정도로 푸르게 빛나고 있다. 작은 솔방울처럼 생긴 연두색 홉들이 사람 키보다도 높이 자란 덩굴에 주렁주렁 매달려 H를 반겨준다.


홉은 다년생 덩굴식물의 꽃이다. 보리, 물, 효모와 함께 맥주의 필수 재료로, 쉽게 말해 맥주라는 요리의 양념 역할을 한다. 열대 과일, 말린 과일, 솔, 훈제, 후추, 허브 등 맥주의 다양한 맛과 향이 바로 홉으로부터 나온다. 맥주를 만들 때 홉을 한가지 쓰는 경우도 있지만 여러 홉을 섞어서 그 맥주만의 독특한 맛을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홉의 종류는 200종 이상이고 지속적인 개량을 통해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겉모양은 다들 비슷해 보이지만 각기 향이 다르다. 주로 쓴맛을 내는 홉을 ‘비터(Bitter) 홉’이라고 하고 풍미와 향을 더해주는 데 특화된 것은 ‘아로마(Aroma) 홉’으로 분류한다. 쓴맛과 풍미, 향 등 여러 가지 역할을 모두 하는 ‘유틸리티(Utility)’ 홉도 있다.


맥주 맛을 표현할 때 ‘호피(hoppy)하다’는 것은 대개 과일, 솔, 허브 등의 싱싱한 향이 돋보이는 것을 말한다. 수제맥주집에 가서 ‘호피한 것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십중팔구 미국식 인디아페일에일(IPA)을 내놓을 것이다.

 

 

홉 농장 - pixabay 제공
홉 농장 - pixabay 제공

홉이 맥주의 맛만 내는 것은 아니다. 홉 속에 노란 부분인 루플린(Lupurin)에서 나오는 여러 성분이 맥주의 풍미와 쓴맛을 내주고 거품을 오래 가게 하고, 천연 방부제 역할을 한다. 또 맥주를 만드는 과정에서 액체를 맑고 깨끗하게 정화하는 작용도 한다. 소화촉진, 식욕증진 효과와 일부 최면 효과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쯤에서 몹쓸 응용력이 발휘된다. ‘그래서 맥주 파는 가게를 호프집이라고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호프집의 호프(hof)는 ‘마당, 궁정, 정원’이라는 뜻의 독일어로 맥주 재료 홉과는 상관 없다.


OB맥주(당시 동양맥주)가 1986년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 처음으로 생맥주 전문점 ‘OB호프’를 열고 체인점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우리나라에서 ‘호프=생맥주’의 등식이 자리잡았다고 한다.


홉은 덩굴 식물이기 때문에 타고 올라가도록 지지대를 세워준다. 덩굴을 적당히 잘라주지 않으면 10m가 넘게 자란다. 8월말에서 9월초까지 수확하며 부패를 방지하고 향을 보존하기 위해 바로 건조시키거나 맥주를 만드는 데 사용해야 한다.


홉의 최대 생산지는 독일이고 두 번째는 미국이다. 체코, 영국, 뉴질랜드에서도 홉이 많이 재배되고 있다. 북한의 주요 수출품목 중 하나도 홉이라고 한다. 국내에서는 작은 규모로 실험적으로 재배되고 있다.


홉의 세계에도 계급이 있다. ‘아마릴로(Amarillo)’ 홉의 경우 미국의 한 농장에서 특허권, 상표권을 갖고 독점 재배하기 때문에 구하기가 어렵다. 또 뉴질랜드에서 재배되는 ‘넬슨 소빈(Nelson Sauvin)’ 홉은 공급량이 달려 구매에 제한이 걸려있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인기 많은 홉들은 일반 홉에 비해 가격이 몇 배씩 비싸다.

 

 

줄기에 매달린 홉 - 황지혜 제공
줄기에 매달린 홉 - 황지혜 제공

아, 땀이 맺힌다. 해가 올라오면서 대지가 달아오른다. 이쯤 되면 노동력 착취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다행히도 작업이 끝난다. 맥주 양조장으로 이동해 수확한 홉을 바로 양조에 투입한다. 이렇게 ‘생 홉’을 넣어 맥주를 만드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런데 한달 후 완성된 맥주의 맛은 펠릿 홉을 쓴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반전)


맥주 양조장을 구경하고 신선한 맥주를 한입에 털어 넣고, 양조장 마당에서 펼쳐진 바비큐 파티를 느긋하게 즐기다 보니 홉 농장의 노예가 돼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봄에는 잡초 뽑고, 여름에는 수확하고, 가을에는 맥주 먹고, 겨울에도 맥주 마셔야지…

 


<’1일 1맥’ 추천맥주>
 

파이어스톤 워커 브루잉 컴퍼니 제공
파이어스톤 워커 브루잉 컴퍼니 제공

이름 : 파이어스톤 유니온잭 인디아페일에일(Firestone Walker Union Jack IPA)
도수 : 7.5%


처남과 매형이 손잡고 설립한 미국 캘리포니아 맥주 양조장에서 만들어진 맥주. 포도, 오렌지, 자몽 등 과일향이 치고 들어오는 전형적인 미국 서부 해안식 IPA다. 씁쓸한 맛과 함께 단맛도 적절하게 느껴진다.


유니온잭 IPA에는 풍미와 아로마, 씁쓸함을 책임지는 아마릴로, 캐스케이드, 센테니얼, 시트라 등 6가지 홉이 들어갔다.

 

 

※ 필자소개
황지혜. 비어포스트 에디터, 전 매일경제신문 기자. 폭탄주와 함께 청춘을 보내다 이제는 돌아와 수제 맥주 앞에 선 한량한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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