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시선 44]입맛을 일으키는 ‘무’의 힘을 빌려서라도

2016년 12월 17일 18:00

GIB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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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날의 재담이었을 것이다. 홀시아버지를 모시며 살고 있는 평범한 새댁 며느리가 어느 날 차린 밥상이 하필 하나같이 ‘무’를 식재료로 삼았단다. 무밥, 뭇국, 깍두기, 총각김치, 무나물, 무말랭이, 무생채, 무장아찌, 무조림, 동치미가 그것이었다. 일률적인 이 밥상을 내려다본 시아버지께서는 수저를 들려다 말고 “허허허” 하고 어이없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에 며느리가 하는 말, “아버님께서 이렇게 좋아하실 줄 알았으면 진작부터 준비해 드릴 걸 그랬네요. 호호호.” 우스갯소리로 만든 이야기지만, 생각해보면 양쪽 손가락을 꼽아야 할 만큼 ‘무’로 만들 수 있는 반찬이나 요리는 참 많다.

 

갈치조림이나 고등어조림을 할 때도 생선 밑에 무를 깔아야 제맛이 나고, 대구탕이나 소고깃국을 끓일 때도 무를 썰어 넣어 국물을 우려내야 그 맛이 시원하다. 한겨울 노점 앞에 서서 입김을 날리며 먹은 어묵 꼬치를 내려놓고 입가심으로 후후 불어가며 마시는 어묵 국물도 큼직하게 썰어 넣은 무가 흐물흐물해지도록 끓여야 달금하고 구수한 맛이 우러난다. 이처럼 무는 본연의 아삭한 섬유질이 살아 있는 그대로에 칼칼한 양념을 무쳐 먹기도 하고, 다른 식재료와 함께 가열해서 무른 상태로 부드럽게 섭취하기도 한다. 전자의 무는 시원하고 개운한 맛 그 자체가 주인공이고, 후자의 무는 음식의 조연이자 배경이지만 그것이 빠지면 그 음식 맛은 대개는 맹맹해진다.

 

한자로 ‘蘿蔔’(나복)이라고 쓰는 ‘무’의 원산지는 지중해 연안이다. 기원전 400년 이전에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유입된 뒤 아시아 대륙 동쪽 끝인 한반도에는 삼국시대에 들어왔다. 연중 강우량이 적지 않아서인지 한반도에서 대략 1500년 전부터 어디서든 잘 자라고 있는 무는 94%를 수분으로 채우고 있다. 약간의 탄수화물과 섬유질 등을 제외하면 묵직한 무의 대부분은 물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 물은 맹물이 아니라 비타민C가 가득한 물이다. 신선한 야채가 적어 겨울에 부족할 수 있는 대표 비타민을 많이 함유하고 있으니 무는 식생활 면에서도 꽤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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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좋아하는 평양식 냉면이나 강원도식 막국수의 기본 식재료인 ‘메밀’이 한반도에 대량으로 유입되었을 때는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직후란다. 조선을 굴복시킨 청태종은 조선인들을 아예 고사(枯死)시키려고 조선 땅에 메밀을 많이 경작시켰단다. 메일 껍질에는 사람의 위장을 깎아내는 독성 물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메밀로 국수를 만들어 먹던 조선인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더란다. 우리 조상들은 슬기롭게도 메밀과 함께 무를 곁들여 먹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식당에서 손님에게 냉면이나 막국수를 내놓을 때 김치 대신에 무절이가 테이블에 놓이는 것이며, 일본식 메밀소바에도 무즙을 풀어서 먹는 것이다. 또한 얇게 저민 생선회가 가지런히 놓인 접시에 무채를 먼저 깔아놓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것은 미관 때문이 아니라 무채가 날것에 있을 수 있는 독성을 흡수해주기 때문이다. 그렇듯 ‘무’에는 음식물 소화를 돕는 아밀라아제(amylase)와 여러 독소를 해독시키는 카탈라아제(catalase)라는 성분이 있다.

 

지난 휴일에 시장에 나가 거의 끝물인 무와 총각무 다발을 사 왔다. 배추김치와 동치미로 김장은 보름 전에 마쳤지만 깍두기와 총각김치가 빠졌기 때문이었다. 한입 가득한 크기로 깍두기를 썰며 아내의 일손을 도왔으니, ‘병신년’을 떠나보낼 즈음이면 잘 익은 깍두기와 총각김치로 속 시원한 밥상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무’로 차린 그날의 밥상을 물리면서, 올해 이 나라에 황당하게 드러난 독소를 제거하고, 활력이 떨어져가는 내 몸속을 청소하고, 켜켜이 쌓인 마음의 스트레스도 이제는 모두 소화되기를 앙망한다. 어이없는 ‘우주의 기운’ 어쩌구가 아니라, 입맛을 일으키는 ‘무’의 힘을 빌려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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