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시선 43] ‘직업인’으로 산다는 것

2016년 12월 10일 18:00

나의 정체성은 시인이지만, 직업인으로서 나는 출판 편집인 혹은 출판인이다. 1년 남짓의 한때는 20년간의 그 일에서 떠나고자 했지만, 낫과 삽을 고이 닦아 곳간에 세워놓고 도회지로 떠났던 농부가 어느 날 밤 막차로 귀향해 이튿날 새벽부터 다시 들녘에 나선 듯이, 결국 나는 책 편집 일에서 손을 놓지 못하고 원고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되었다. 


직업인으로서 내가 편집한 책은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200권쯤 되지 않을까 싶다. 근래 2년 동안은 무려 1,808쪽의 방대한 책 한 권을 혼자서 편집했다. 그 책은 셰익스피어가 작고한 지 400주년이 된 올해 달력을 한 장 남겨둔 지난주에 화려하고 묵직하게 발간되어 이번 주에도 여러 언론과 SNS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렇듯 나는 세상의 수많은 직업 중에 하나인 출판인으로서 ‘글의 숲’에서 살아가고 있다.

 

GIB 제공
GIB 제공

좋은 직업은 무엇일까. 세상에 고충 없는 직업이 있을까마는, 일반적 생활 가치로는 일의 강도와 노동 시간, 사회적 위상, 보수나 수입, 지속 여부의 안정성, 일의 보람 등이 그것의 판단 기준이 되지 않을까. 또한 그 판단과 함께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점은 직업인으로서 접촉하게 되는 구성원이나 외부인과의 관계, 즉 ‘인간관계’일 것이다. 때때로 보편적 가치 기준의 ‘직업 자체’보다 오히려 그 안팎에서의 구체적인 인간관계가 해당 직업의 고회를 가늠하는 실질적인 잣대나 저울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눈금은 ‘인격’ 혹은 ‘인권’ 문제의 부피나 무게에 비례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인간관계에서 생긴 신뢰나 상처는 기쁨이나 슬픔, 고마움이나 섭섭함, 희망이나 절망을 직업인의 마음에 새겨놓는다.


그럼에도 현실 생활을 하는 모든 직업인은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감정노동이든 본인의 능력을 투여해 자신에게 주어지거나 스스로 개발한 일을 한다. 주어진 일에 아무런 변화가 없을 때, 그 일을 수행하는 어떤 이는 안정감을 느끼겠지만, 또 다른 이는 권태감을 느낄 것이다. 반면 스스로의 의지로 일을 개발하는 어떤 이는 스트레스와 함께 성취감 혹은 낭패감을 느끼겠지만, 일의 변화가 두려워 보수적으로 반복되는 일만 행하는 다른 이에게는 실패가 주는 낭패감은 없겠지만 성공에서 얻는 성취감도 없을 것이다. 대신에 그 후자는 진화를 거부함으로써 어쩌면 그 분야의 현장에서 도태될 것이다.

 

GIB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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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경제 사회에서 자유로운 직업은 무엇일까. 있기는 한 걸까. 있다면, 그 직업에는 어떤 식으로든 일의 관계에서 ‘속박’이나 ‘제약’이 부재하거나 최소라는 전제가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누구든 사회적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모든 직업인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여러 성격의 제약으로부터 충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나마 흔치 않은 희소성과 높은 수준의 전문성을 갖춘 프리랜서 등의 직업인이 비교적 자유롭게 독립적인 일을 하지 않을까. 혹은 르네상스 시대의 후원자(patron)처럼 경제적으로 크게 성공한 누군가에게 전폭적으로 신뢰받는 어떤 역할자로서의 직업인이라면 비교적 자율적으로 자기 일에 몰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아주 일부를 제외한 웬만한 직업인은 일의 관계에서 불편하지 않을 만큼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직업’이라는 것 자체가 퇴근 후에 홀가분하게 일렉 기타를 메고 마음 맞는 록 밴드 멤버가 모여 있는 합주실로 향하는 행위가 아닌, 경제생활을 위해 불가피하게 선택한 ‘밥벌이’이기 때문이다.

 

 

※ 필자 소개
윤병무. 시인. 시집 <5분의 추억>과 <고단>이 있으며, 동아사이언스 ‘스페셜’ 코너에 [생활의 시선]을 연재하고 있다.

 

※ 편집자주
뉴스를 보다보면 무엇인가를 분석해서 설명을 해주는 내용이 대다수입니다. 그래야 원인을 정확하게 찾고, 대책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가끔은 고개를 들어 사물을 그대로 보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대상을 온전히 바라보면 분석한 내용을 종합할 수 있는 통찰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시인의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는 ‘생활의 시선’을 매주 연재합니다. 편안한 자세로 천천히 읽으면서 감정의 움직임을 느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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