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속 면역 담당한 미세아교세포의 두 얼굴

2016.11.23 18:16

서양철학사에 나오는 ‘그 철학자(The Philosopher)’, 즉 최고의 철학자는 누구를 말하는 걸까. 소크라테스일까 아니면 그의 제자 플라톤일까. 답은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뿐 아니라 많은 학문의 창시자라고 할 정도로 넓은 범위에 손을 뻗쳤다. 그의 저서를 읽어보면 오늘날 학자가 쓴 것 같다. 서양의 학문은 ‘양자도약’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아리스토텔레스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가운데 상당수가 소실됐지만 플라톤을 제외한 고대 그리스의 다른 철학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저서가 남아 있다. 흥미롭게도 그 가운데 반 이상이 과학책이다. 그럼에도 한글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책은 없었다. 그런데 지난해 이 무렵 김진성이라는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소론집’을 번역해 내놓았다. 역자 소개를 보니 ‘자연학’을 옮기고 있다고 한다.


지난 여름 한 책을 읽다보니 여러 곳에서 ‘자연학’을 인용했다. ‘혹시 번역서가 나왔을까?’해서 인터넷서점을 검색해보니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읽기’라는 책이 지난해 12월 나왔다. 그런데 역자가 김진성이 아니라 임두원이라는 분이다. 그리고 도서주문판매(POD)라는 특이한 방식의 책이다. 한 번에 천 권, 이천 권 찍어 재고를 두는 기존 출판방식이 아니라 ‘주문 후 제작되는 맞춤도서’다. 즉 책 파일만 있는 상태로 주문이 들어오면(물론 한 권이라도) 프린트하고 제본해 보내준다.


역자소개를 보니 공학박사로 국립과천과학관에서 일하는 공무원이다. 잠깐 고민하다 새로운 경험이기도 해서 한 번 사봤다. 대학시절 제본한 책보다는 낫지만 일반 출판도서에 비해 모양새는 떨어졌다. 그러나 내용은 기대이상이었다. 역자는 머리말과 함께 전체 여덟 권의 매 권 앞에 해설을 붙였고 자세한 각주도 달았다.


문득 ‘출판사를 알아봤을 텐데 책 내주는 데가 없었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좀 씁쓸했지만 POD라는 방식이 생겨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벌겠다는 생각만 없으면 이제 누구나 책을 낼 수 있는 시대가 됐다(역서도 저작권이 소멸된 경우 법적문제가 없다).

 

 

19세기 후반 선천성 면역인 식작용을 발견한 메치니코프는 1908년 ‘수명 연장’이라는 대중과학서를 출판했다. 여기서 그는 면역세포의 잘못된 식작용이 노화를 일으킨다고 주장했다. - 아마존 제공
19세기 후반 선천성 면역의 한 유형인 식작용을 발견한 메치니코프는 1908년 ‘수명 연장’이라는 대중과학서를 출판했다. 여기서 그는 면역세포의 잘못된 식작용이 노화를 일으킨다고 주장했다. - 아마존 제공

메치니코프의 선견지명


비슷한 시기에 필자는 일리야 메치니코프의 저서 ‘수명 연장’의 영어판(The Prolongation of Life)을 샀다. 봄에 읽은 메치니코프의 전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그가 쓴 책을 읽어 보고 싶었다. (메치니코프의 삶과 업적에 대해서는 과학카페 280 ‘요거트의 상징 메치니코프 타계 100주기’ 참조.) 메치니코프는 노벨상까지 받은 저명한 과학자이지만 신문에 글도 많이 기고하고 대중과학서적도 여러 권 냈다. 그 가운데 대표작이 1908년 출간한 ‘수명 연장’으로 2년 뒤 영어판이 나왔다. 읽어보니 글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 솔직히 찰스 다윈보다도 한 수 위 같았다.


그런데 최근 학술지 ‘네이처’(11월 10일자)에 실린, 신경퇴행성질환 연구의 현황을 다룬 특집을 훑어보다 문득 ‘이 책을 번역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물론 출판사를 알아보겠지만 책을 내줄 곳이 없으면 임 박사처럼 POD 방식을 택할 생각이다.


필자가 특집을 보고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건 노화 메커니즘을 설명한 ‘수명 연장’ 3장의 내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메치니코프는 자신이 오랫동안 연구해온, 선천성 면역의 한 유형인 식작용(phagocytosis)이 노화의 주원이라고 주장했다. 즉 병원체나 노폐물을 먹어 없애는 대식세포 같은 식세포가 몸의 세포를 공격하면서 노화가 진행된다는 것이다. 메치니코프는 “뇌가 줄어드는 건 신경식세포가 신경세포를 파괴하기 때문”이라고 쓰고 있다. 


‘수명 연장’은 무척 재미있지만 100년도 더 된 책이라 오늘날 과학지식으로 보면 틀린 내용이 꽤 된다. 따라서 이 부분을 읽으면서도 그런 경우로 생각하며 넘어갔다. 그런데 ‘네이처’의 특집에 실린 여러 리뷰논문들을 보니 곳곳에서 면역세포의 오작동이 신경퇴행성질환 발생의 주요 원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알츠하이머병, 루게릭병, 파킨슨병 등 치료법이 없는 신경퇴행성질환에는 어김없이 면역세포의 식작용이나 염증반응이 개입돼 있었다.


깜짝 놀란 필자는 ‘수명 연장’의 그 부분을 다시 보며 신경식세포(neuronophage)를 검색해봤다. 그런데 이는 더 이상 쓰이지 않는 용어이고 뇌에서 식작용을 하는 세포는 주로 미세아교세포였다. 그리고 리뷰논문들에 따르면 미세아교세포는 주로 시냅스를 먹어치운다. 따라서 메치니코프의 서술을 약간 바꿔 “뇌가 줄어드는 건 미세아교세포가 시냅스를 파괴하기 때문”이라고 쓰면 최신 연구결과를 요약한 글이 된다! 물론 노화와 신경퇴행성질환이 항상 연결된 건 아니다.

 

 

미세아교세포는 사방으로 잔가지를 뻗친 모양이지만 식작용을 할 때는 공모양(왼쪽 노란색)으로 바뀌며 대식세포와 비슷한 형태가 된다. - R. Cassiani-Ingoni/SPL 제공
미세아교세포는 사방으로 잔가지를 뻗친 모양이지만 식작용을 할 때는 공모양(왼쪽 노란색)으로 바뀌며 대식세포와 비슷한 형태가 된다. - R. Cassiani-Ingoni/SPL 제공

시냅스가 보내는 신호 인식해 식작용


지난 수십 년 사이 뇌과학 분야는 눈부시게 발전했고 그 과정에서 뇌세포를 바라보는 관점도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뇌세포 하면 곧 뉴런(신경세포)을 뜻했지만(물론 지금도 그런 경향이 남아 있다), 실제 숫자로 보면 뉴런은 10%밖에 안 되고 나머지는 교세포(glia cell)다. 그럼에도 교세포는 뉴런에 영양을 공급하고 노폐물을 흡수하는 보조자로 여겨져 주목받지 못했다. 그런데 교세포가 이런 역할뿐 아니라 뉴런의 성장에도 영향을 미치고 신호전달 속도와 안정성에도 관여하는 등 신경계에서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교세포는 형태와 기능에 따라 몇 가지 종류로 나눠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미세아교세포(microglia cell)이다. 생긴 건 비슷한데 크기가 좀 작다. 그런데 사실 미세아교세포는 다른 교세포와는 태생이 다르다. 즉 신경계의 세포가 아니라 면역계의 세포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경우 임신 한 달 무렵 뇌가 되는 부분으로 들어간 원시 대식세포가 분화해 미세아교세포가 된다. 즉 미세아교세포는 뇌에 침투한 병원체나 뇌세포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처리하는데 특화된, 대식세포의 친척인 셈이다.


뇌세포의 12%를 차지해 뉴런과 숫자가 비슷한 미세아교세포 역시 오랫동안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평소에는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처리해야 할 대상이 생기면 나타나 식작용을 하고 다시 보초를 서는 뇌 속의 면역세포 정도로 여겨졌다. 그런데 10여 년 전 미세아교세포가 시냅스 가지치기에 관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시냅스 가지치기는 한 마디로 안 쓰는 시냅스, 즉 뉴런 사이의 연결을 없애는 과정이다. 뇌발달 과정을 보면 뉴런 사이에 시냅스가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하게 만들어져 있는데, 필요없는 건 가지치기를 통해 정리되고 많이 쓰는 시냅스는 강화되면서 효율적인 뇌회로가 형성된다.

 

 

미세아교세포(녹색)가 뉴런 사이의 시냅스 가지치기 과정에서 식작용을 하는 장면. 불필요한 시냅스 조각(빨간색과 파란색)을 먹어치우고 있다.  - 뉴런 제공
미세아교세포(녹색)가 뉴런 사이의 시냅스 가지치기 과정에서 식작용을 하는 장면. 불필요한 시냅스 조각(빨간색과 파란색)을 먹어치우고 있다.  - 뉴런 제공

그런데 최근 수년 사이 놀라운 발견이 이어지고 있다. 미세아교세포가 뇌발달 과정에서 꼭 필요한 시냅스 가지치기만 하면 좋으련만 그냥 놔둬야 할 시냅스까지 먹어치우면서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즉 알츠하이머병 등 신경퇴행성질환의 전개과정을 보면 아밀로이드베타 같은 단백질의 침착이 보이기 전에 이미 시냅스의 손상이 진행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즉 쓰이지 않는 시냅스가 경우 “나를 잡아먹어라”는 신호를 보내 미세아교세포가 식작용을 하는 게 정상적인 가지치기라면, 뭔가 착오가 생겨 미세아교세포가 일하고 있는 시냅스를 없앤 결과가 신경퇴행성질환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나이가 들수록 이런 착오도 늘어나기 마련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런 착오는 미세아교세포가 아니라 시냅스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즉 무슨 이유에서인지 일해야 할 시냅스가 “나를 잡아먹어라”는 신호를 보내고 미세아교세포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한 결과가 뇌회로의 파괴로 이어지는 셈이다. 따라서 시냅스가 보내는 신호물질(Clq라는 단백질이 유력한 후보다)을 항원으로 하는 항체를 만들어 신호물질을 없애면 잘못된 시냅스 가지치기가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실제 이런 항체가 개발되고 있고 내년에 알츠하이머병과 헌팅턴병, 녹내장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이 진행될 예정이다. 진행을 늦추는 약물만 있을 뿐 치료제가 없는 신경퇴행성질환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 필자소개
강석기. 서울대 화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지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4권, 2012~2015),『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2014)가 있고, 옮긴 책으로 『반물질』(2013), 『가슴이야기』(201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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