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의 맥주생활 (10)] 흑맥주의 세계

2016.11.25 16:30

쓸쓸하게 길 가에 말라붙은 낙엽을 내려다보며 올 한 해를 돌아보니 울적해진다. 올해도 이렇게 가는 건가. 한 해가 다 가도록 끈덕지게 한 일이라곤 맥주 마신 것뿐. 남들은 다들 신나게 잘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이 나이 되도록 아직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되는 지 모르겠고 뜻대로 되는 것도 없고… 눈물이 또르르.


뉴스를 틀면 무슨 막장 드라마가 고구가 줄기처럼 끝없이 나오는데… 역시 금속수저 없는 나는 이런 세상에서 뭘 어떻게 해도 안 되는 거지. 다 이유가 있는데 지금까지 괜히 아등바등 살아왔네. 대학 가면 뭐하나, 취직하면 뭐하나, 결혼하면 뭐하나, 승진하면 뭐하나… 내 인생 제자리 걸음인데. 인생만사 무상하다. 나오는 것은 한숨뿐.


이런 기분이 들 때, H를 풀어주는 것은 역시 술.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어 줄 진한 맥주 한잔이 필요하다. 카푸치노 같은 두터운 거품 아래 고독을 한 스푼 담은 검은 맥주. 집안의 불을 다 끄고 어둠보다 더 어두운 흑맥주에 취하며 기분을 달래야겠다.

 

 

싱글핀에일웍스 제공
싱글핀에일웍스 제공

으스스한 바람이 불면 생각나는 흑맥주. 겨울 밤처럼 칠흑 같은 어둠을 품은 흑맥주. 흑맥주라고하면 ‘검은색 맥주’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지만 사실 흑맥주의 세계는 너무나 넓고도 깊다. 자세히 보면 색깔도 어두운 갈색부터 암흑 같은 검은색까지 다양하고, 알코올 도수나 맛도 천차만별이다.

 


흑맥주는 세다?


일단 오해는 풀고 가자. 색깔만 보고 흑맥주는 밝은 색 맥주보다 도수와 칼로리가 높아 ‘헤비’하고 독하다고 여기기 쉽다. 이는 인종주의에 버금가는 편견이다.


흑맥주의 색깔은 맥주 재료에 볶은 보리를 얼마나 섞느냐, 또 얼마나 볶은 보리를 쓰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일 뿐 도수와는 관계가 없다. 열이 가해져 갈색, 고동색 또는 검은색에 가깝게 변한 보리가 어두운 색의 맥주를 만드는 것이다.


알코올 도수는 맥주에 들어가는 전체 보리의 양에 의해 좌우된다.


실제 수입 흑맥주 중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기네스 드래프트(Guinness Draught)는 도수가 4.2%로 오히려 카스(4.5%)보다 낮다. 체코의 까만 맥주 코젤 다크(Kozel Dark)는 3.8%에 불과하다.


물론 도수가 높은 흑맥주도 많이 있지만(독한 흑맥주는 ‘H의 맥주생활<9> 찬바람 불 땐 이 맥주’ 참고) 주변에서 쉽게 접하는 어두운 맥주들은 대부분 알코올 도수 5% 안팎이다. 맥주의 칼로리는 대부분 알코올에서 나오는 만큼 흑맥주의 칼로리가 높다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독일에서 온 짙은 고동색 맥주 둔켈(Dunkel)


흑맥주에도 계보가 있다. 밝은 색 맥주와 마찬가지로 크게 라거(Lager)와 에일(Ale)로 나뉜다. 라거는 에일에 비해 낮은 온도에서 오래 발효한 맥주고 에일은 상대적으로 높은 온도에서 짧은 시간 발효한 맥주다. 밝은 맥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일반적으로 라거 방식보다 에일 방식의 흑맥주에서 커피, 초콜렛 등 다양하고 깊은 향과 좀더 쓴 맛, 묵직함을 느낄 수 있다.


라거 방식 흑맥주로는 독일 태생의 둔켈과 슈바르츠비어(Schwarzbier) 등이 대표적이다. 둔켈은 ‘어두운’이라는 뜻의 독일어로 2000년대 초반 한일 월드컵 즈음 우후죽순 생겨났던 독일식 하우스맥주 전문점에서 먹어 본 흑맥주가 바로 둔켈이다. 갈색 빛이 도는 검은색으로 구수한 맛을 경험할 수 있다. 슈바르츠비어는 이보다 색이 짙고 좀더 묵직하다. 슈바르츠는 ‘검은’이라는 뜻이다. 이 정직한 독일!

 

 

pixabay 제공
pixabay 제공

영국의 ‘짐꾼’ 맥주 포터


이와 함께 영국이 고향인 포터, 스타우트 등은 에일 방식으로 양조된 흑맥주다. 영국에서 짐꾼(포터)들이 일을 마치고 마시던 대중적인 맥주여서 포터라고 이름 붙여졌다는 설과 짐꾼들이 펍에 맥주를 배달해놓고 ‘포터!’라고 외친 데서 유래했다는 얘기가 있다.


영국의 포터가 아일랜드로 건너갔고, 기네스의 창업자 아서 기네스(Arthur Guinness)가 이 포터를 더 씁쓸하고 묵직하게 만들어 ‘스타우트’라는 스타일이 탄생했다. 스타우트는 ‘강한’ ‘굳센’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하이트진로가 생산하는 ‘스타우트’ 맥주는 제조 공정을 봤을 때 스타우트 스타일은 아니다. 라거 효모로 만든 흑맥주기 때문에 오히려 둔켈 쪽에 가깝지만, 강한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브랜드명을 스타우트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포터 맥주 - 빅이에일즈(Big E Ales) 제공
다양한 포터 맥주 - 빅이에일즈(Big E Ales) 제공

어두운 색 맥주를 종류별로 한잔, 두잔 마시다 보니 그래도 이 정도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쓸쓸할 때 마실 맥주가 있고, 세상이 뭐 같아도 같은 마음으로 거리에 나서는 사람들이 있고… 이보다 더 나빠지겠냐는 안도감도 든다.


오늘은 좀더 마시다가 ‘하는 것보다 지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화장을 피부에 남겨둔 채 나도 모르게 쓰러져 잠들어야겠다. 피부보다 마음의 치유가 중요한 요즘이므로…

 


<’1일 1맥’ 추천맥주>

 

디아지오코리아 제공
디아지오코리아 제공

이름 : 기네스 드래프트(Guinness Draught)
도수 : 4.2%


아일랜드에서 만들어진 스타우트의 원조 ‘기네스’의 생맥주(처럼 만든) 버전. 견과류, 커피향과 초콜릿향에 씁쓸한 맛까지 즐길 수 있다. 풍부한 거품이 만들어내는 부드러운 질감이 특징이다. 뚜껑을 딸 때 캔 속의 기압이 갑자기 낮아지면서 안에 들어있는 작은 구슬(위젯)에 들어있던 액화질소가 기화하면서 거품을 만들어낸다.


440ml가 충분히 들어갈 잔을 준비한 후 맥주를 따르고 베이지색 거품이 위로 다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밀한 거품을 깊이 느끼며 한 모금 들이킬 때 기네스 드래프트의 매력이 대폭발한다.

 

 

 

 

※ 필자소개
황지혜. 비어포스트 에디터, 전 매일경제신문 기자. 폭탄주와 함께 청춘을 보내다 이제는 돌아와 수제 맥주 앞에 선 한량한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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