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윤리와 연구자공동체, 그리고 사회적 책임

2016년 07월 22일 22:43

※편집자주

한국 사회가 ‘합리적’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요? 과학기술이 각종 논란의 중심이 되는 일이 점점 많아집니다. 그런데 대안을 내는 과정에 과학기술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학기술자들의 의견을 듣는다고는 하지만 다양한 의견이 아닌, 어떻게 결정됐는지 모호한  ‘일치된 의견’이 성명서로 발표되곤 합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현장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과학기술자들이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ngineers & Scientists for ChangeㆍESC)’를 만들었습니다. 동아사이언스는 과학기술계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ESC의 목소리를 전합니다. 주로 △나의 연구, 나의 실험 △내가 보는 과학과 사회 △연구윤리/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책임 △확실한 과학, 논쟁적인 과학 등 4가지 분야의 글이 소개됩니다. 동아사이언스를 통해 과학기술계의 다양한 의견이 오가고, 합리적이고 건강한 토론이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윤태웅 ESC 대표ㆍ고려대 공대 교수

김명호 작가 제공
김명호 작가 제공

 

“이렇게 하면 표절인가요?”

“이건 중복게재에 해당하지 않나요?”

“이래도 괜찮은가요?”

 ㆍ

연구윤리 관련 강의를 할 때면 이런 식의 질문을 많이 받는다. 연구자들은 자신의 행위가 혹 잘못은 아닐지, 그게 걱정이다. 저작재산권 같은 법률적 쟁점에 주목하면서 말이다. 질문은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좋은 질문으로 의미 있는 문제를 만드는 게 답 찾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 연구윤리 이야기는 어떤 물음에서 시작되었을까? 아니 어떤 질문을 하는 게 좋을까?

 

연구윤리 하면 흔히들 표절이나 데이터 위변조 같은 부정행위를 떠올린다. 연구윤리의 논점을 다루는 맥락이 대개 그러하기 때문이다. 장관 후보자의 청문회 풍경이 연상되기도 하고, 제법 괜찮은 평가를 받던 학자가 논문과 관련해 구설에 오르는 장면이 겹치기도 한다. 어떤 땐 연구윤리가 마치 저격의 도구가 된 듯한 느낌마저 든다. 비난받아 마땅한 연구자들이 분명히 있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안타깝게도 연구윤리 이야기엔 대개 악당이 등장한다. 연구윤리 문제가 황우석 사태와 함께 벼락같이 찾아온 것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이리라. 악당 짓 하는 연구자를 찾아내 응징해서 그런 일이 더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는 데 적지 않은 이들이 공감한다. 그런데 이게 최선일까? 좀 오래되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그림 하나를 살펴보자.

“N.H. Steneck, What Do We Know? Two Decades of Research on Research Integrity, World Conference on Research Integrity, 2007”의 그림을 김명호 작가가 다시 제작한 것입니다. - 김명호 작가 제공
“N.H. Steneck, What Do We Know? Two Decades of Research on Research Integrity, World Conference on Research Integrity, 2007”의 그림을 김명호 작가가 다시 제작한 것입니다. - 김명호 작가 제공

그림에서 FFP는 대표적인 연구부정행위인 데이터 위변조(Fabrication & Falsification)와 표절(Plagiarism)을 뜻한다. RCR은 책임 있는 연구(Responsible Conduct of Research)를 의미하고, 좋은 연구(Good Research Practice)라 할 수도 있다. QRP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연구(Questionable Research Practice)를 말한다. RCR은 가야 할 방향이고, FFP는 가장 부정적인 사례다.

 

한데 이 그림을 보면, 이 둘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고, 그사이에 아주 넓은 회색 지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회색 지대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래서 QRP다. 딜레마 상황도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연구윤리의 논점이 FFP에 머물면, 넓은 회색 지대의 쟁점을 놓칠 수밖에 없게 된다.

 

‘기름방울 실험’으로 최소 전하량을 측정해 노벨상을 받은 밀리컨(Robert A. Millikan, 1868~1953)의 사례는 데이터의 합리적 선택과 부당한 변조 사이의 경계가 그리 분명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밀리컨은 논문에서 58개의 기름방울을 사용했다고 썼으나, 사실은 140개 이상의 기름방울을 관찰했다고 한다. 밀리컨이 원하는 데이터가 아니라서 나머지 기름방울이 버려진 것인지, 아니면 오랜 실험 경험을 통해 얻은 암묵적 지식을 바탕으로 선택되지 않은 것인지가 쟁점이었다. 이는 밀리컨의 이론이 옳은지 그른지와는 독립적인 논점이다. 과학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관한 이야기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분야를 잘 모르는 나로서는 밀리컨이 140여 개의 데이터 가운데 58개만을 선택했다는 사실과 그 까닭을 논문에 적어주었으면 좋았겠다는 말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개기일식 때 빛이 휘는 걸 관측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을 검증한 에딩턴(Arthur Stanley Eddington, 1882~1944ㆍ후주 참조)의 연구도 비슷한 이유로 구설에 오른 바 있다. 관측 자료들의 질이 떨어지며 브라질의 소브랄에서 얻은 데이터가 무시되었다는 비판이 있었던 탓이다. 데이터의 선택이 합리적인지 아니면 부당한지 따지는 건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 분야의 전문가라 해도 말이다. 본질적으론 연구자 공동체의 숙의가 필요한 문제다. 데이터의 수집과 처리, 그리고 기록과 관리 방법 등에 관해선 연구자 공동체의 폭넓은 합의가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조금씩 바뀌어 갈 수밖에 없다. 과거엔 제본된 종이에 실험노트를 써야 했지만, 이젠 전자 연구노트를 클라우드에 쓰며 데이터를 공유하기도 한다. 숙의와 합의는 한 차례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일상적으로 계속된다. 과학은 집단지성이다.

 

악당(나쁜 연구자)이 활약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은 물론 의미가 있다. 하지만 초점을 거기에만 맞추는 건 바람직하지도 않고 실효성도 크지 않을 성싶다. 표절이나 중복게재 관련 사건이 자주 기사화되지만, 그런 사례가 줄어들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표절로 확인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국회의원이 공천을 다시 받는 경우까지 있었다. 나쁜 사람의 정의(定義)는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리라. 초점을 악당에서 보통 연구자로, 논점을 ‘부정행위를 하지 말자!’에서 ‘좋은 연구를 하자!’로 옮겨야 하지 않을까. 표절을 하지 말자고 하는 대신 인용을 잘하자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논문 작성은 거인의 어깨 위에서 하는 글쓰기다. 일종의 벽돌 쌓기라 할 수 있다. 다른 연구자들이 쌓아놓은 수많은 벽돌 위에 내 벽돌을 한두 장 얹는 일이다. 벽돌들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하는 게 바로 인용이니, 잘 쓴 논문엔 정확한 인용이 필수 요소일 수밖에 없다. 논문 작성과 관련한 논의는 이런 식으로 하면 좋겠다. 표절에 관한 논점은 자연스레 해소될 것이다.

 

좋은 연구란 무엇인가? 좋은 연구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바람직한 연구실 문화는 어떤 모습일까? 이런 질문이 연구윤리의 핵심 논점이어야 하리라 여긴다. 논의의 주체는 연구자 공동체다. 연구윤리 전문가가 판관의 위치에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연구윤리를 개인의 도덕적 잘잘못만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연구윤리는 구조의 문제고, 제도의 문제며, 문화의 문제다. 대학원생이 연구실에서 고통받는 게 지도교수가 꼭 악당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갈등을 조정하고 해소해줄 만한 제도적 장치가 없는 상태에선 단순히 서 있는 자리가 다를 뿐인 보통의 교수가 보통의 학생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악당이 아닌 보통 교수가 결과적으로 가해자가 된다면, 그건 그 교수한테도 안타까운 일이다. 다양한 연구 환경을 이해하는 사람들로 팀을 구성해, 갈등상태에 있는 구성원들을 중재하고 필요에 따라선 대학원생에게 지도교수 변경 등의 도움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런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건설적 과정이 필요하다.

 

연구자의 사회적 책임도 중요한 논점이다. 그런데도 연구윤리 문제의 일부로 별로 언급되지 않는 건 사회적 책임을 제대로 다루기가 어려운 탓이다. 규범으로 강제할 수도 없고 기준도 모호하다. 때론 행위보다 태도와 관련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사회적 책임의 강조가 중립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할 연구에 대한 부당한 압력으로 작용할지 모른다는 걱정도 있다. 하지만 전문 연구의 막대한 영향력, 의도하지 않은 결과의 가능성, 사회문화적 편향성, 연구자의 독점적 지위, 연구의 공공적 성격을 떠올리면, 연구자의 사회적 책임은 복잡하고 어렵다는 이유로 회피할 수만은 없는 논점이다. 정답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고 해서 고민을 멈출 순 없다.

 

공대 교수로서 나는 학생들이 졸업 후 세상에 나가 공학자나 엔지니어로서 자긍심을 지니고 살아가길 바란다. 자신들이 세상을 좋게 만들 수 있는 소중한 존재라고 느끼면서 말이다. 연구자로서 나도 내가 속한 공동체에 대해 자긍심이 더 생기길 기대한다. 그러고 보니 내게 연구윤리는 이렇게 자긍심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연구는 집단지성이기에, 좋은 연구는 좋은 연구자 공동체와 분리될 수 없다. 연구윤리는 부정행위자 응징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좋은 연구자 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발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연구자의 사회적 책임은 피할 수 없는 논점이다.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연구자들이 어떻게 좋은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겠는가.

 

ESC엔 많은 과학기술자가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소속돼 있는 것만으로도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 한다. ESC가 청년과학기술인의 인권과 연구환경 개선에 관심이 있고 크라우드 펀딩 같은 대안적 연구 활동을 모색하는 것도 좋은 연구를 원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연구윤리에 관한 논의도 이런 방향으로 진행되길 기대해본다.

 

※후주

1. 케임브리지 천체연구소 소장이었던 에딩턴은 퀘이커교도로 양심적 병역거부자였다고 한다. 한데 천문학자인 프랭크 다이슨이 에딩턴을 수용소에 보내는 대신 개기일식의 관측 임무를 맡기자고 영국 정부에 제안했고, 영국 정부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한다. 20세기 초반의 일이다.

 

☞[ESC 창립 기사]과학기술인들이 모여 ‘ESC’를 만들었다... ESC의 정체는?

 

※ESC에 대한 정보는 ESC 홈페이지(www.esckorea.org)를 참고하세요. 궁금한 사항은 office@esckorea.org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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