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거트의 상징 메치니코프 타계 100주기: 선천면역에서 프로바이오틱스까지

2016.07.12 10:38

그런데 외국인이 쓴 전기나 자서전은 왜 이렇게 재미있는 걸까?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소설은 최근 미국에서도 드문데,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전기는 꽤 많다.
- 무라카미 하루키


‘이윽고 슬픈 외국어’라는 제목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집을 읽다가 위의 구절을 발견하고 무릎을 쳤다. 십 수 년 전부터 필자가 느껴왔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설가가 이런 소리를 하니 용감한 걸까? 아무튼 필자는 언제부터인가 소설은 가끔 단편을 읽을 뿐 대신 전기를 즐겨 본다.


요즘은 미국 의학사가 대니얼 토데스가 쓴 이반 파블로프의 전기 ‘Ivan Pavlov: a Russian life in science’(작은 글씨에 800쪽이 넘는 엄청난 분량이다)와 단백질감염인자 프리온을 발견한 스탠리 프루시너의 자서전 ‘Madness and Memory’(전기작가들을 믿을 수 없어서 직접 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를 읽고 있다. 그리고 최근 이스라엘 과학저널리스트 루바 비칸스키가 쓴  일리야 메치니코프의 전기 ‘Immunity’를 읽었다.


십여 년 전 국내 한 요거트의 브랜드가 되면서 사람들에게 친숙한 과학자가 된 메치니코프는 1916년 7월 15일 프랑스 파리에서 영면했다. 이번 주 금요일은 그의 100주기인 날이다. 비칸스키의 전기 내용을 토대로 메치니코프의 삶과 업적을 요약해보는 것도 뜻 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메치니코프 사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전기가 최근 출간됐다. - amazon.com 제공
메치니코프 사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전기가 최근 출간됐다. - amazon.com 제공

실명 위기에 자살 시도


메치니코프는 1845년 오늘날 우크라이나 영토인 러시아제국 이바노브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자연 속에 뛰놀며 생물학에 관심이 많았던 메치니코프는 열일곱 살에 가까운 하리코프대 자연과학부에 들어갔다.

 

머리가 비상했던 그는 불과 2년 만에 대학을 마친 뒤 러시아는 연구 여건이 안 되다고 판단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나 동물학을 연구했다. 공부를 마치고 22세에 러시아로 돌아온 메치니코프는 오데사의 노보로시야대에 자리를 잡았고 이듬해 상페테르부르크대로 옮겼다가 1870년 노보로시야대로 돌아왔다. 


이처럼 초특급으로 학자가 된 그는 남부러울 게 없어보였지만 개인적인 아픔은 있었다. 상페테르부르크대에 있을 때 동료 교수의 조카딸 루드밀라 페도로비치를 알게 된 그는 1869년 결혼을 했다. 그런데 신부는 폐결핵을 앓고 있었고 메치니코프가 좀 더 따뜻한 오데사로 직장을 옮긴 것도 그런 아내 때문이었다. 이런 노력에도 루드밀라는 1873년 4월 세상을 떠났다.


평소 눈에 만성 염증이 있었던 메치니코프는 아내의 병간호에 심신이 탈진해서인지 안질환이 심각해졌고 아내를 잃은 충격에 실명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더해진 그는 진통제 모르핀을 다 털어먹고 자살을 기도했다. 그러나 워낙 과량을 먹어 바로 토해 죽음을 면했다. 다행히 눈의 상태가 호전됐고 메치니코프는 삶의 의욕을 되찾았다.


메치니코프의 연구주제는 무척추동물의 발생학으로 거의 연구가 안 된 분야였다. 따라서 메치니코프의 연구는 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학자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다. 아내가 죽고 2년이 지났을 무렵 메치니코프는 부유한 지주를 알게 됐는데 그의 쌍둥이 딸 가운데 한 명인 올가에게 한 눈에 반했다.

 

불과 열여섯 살이었던 올가 역시 열네 살 연상의 카리스마가 넘치는 과학자에게 매료됐고 둘은 바로 결혼했다. 결혼 5년차인 1880년 무렵 찍은 사진을 보면 앉아 있는 남편에 기대어 선 채 한쪽을 응시하고 있는 올가의 강렬한 눈빛이 인상적이다. 두 사람은 메치니코프가 71세로 사망할 때까지 함께 했고 올가는 남편의 전기를 쓰기도 했다.

 

아내 올가와 함께 한 메치니코프. 1880년 경 사진으로 메치니코프는 35세, 올가는 21세 무렵이다. - 러시아과학원 아카이브 제공
아내 올가와 함께 한 메치니코프. 1880년 경 사진으로 메치니코프는 35세, 올가는 21세 무렵이다. - 러시아과학원 아카이브 제공

여행지에 차린 개인실험실에 역사적 발견


1882년 알렉산더 2세가 암살되면서 러시아가 정치적 혼란에 휩싸이자 안 그래도 연구여건이 안 되는 러시아에서의 생활을 답답해하던 메치니코프는 사표를 던지고 유럽으로 장기여행을 떠났다. 참고로 부유한 아내 덕분에 돈 걱정은 없었다. 이탈리아 메시나에 머물던 메치니코프는 개인 실험실을 차리고 발생학 연구를 이어갔다.


이해 10월 메치니코프는 생물학사에 전설로 남은 발견을 한다. 즉 불가리아 유충이 먹이를 먹는 방법을 연구하던 중 불가사리 체내에서 이상한 세포를 발견했다. 즉 아메바처럼 떠도는 세포들이 보였는데 붉은색의 커민 가루를 넣자 이를 ‘먹어’ 버렸다.

 

현미경에서 벌어진 일에 깜짝 놀란 메치니코프는 이 현상에 대한 설명을 찾다가 문득 “이 세포들이 불가사리에 침입한 병균들도 먹어치우는 면역세포일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상상력은 인체의 혈액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날 거라고 데까지 뻗어갔다.


메치니코프는 이런 세포에 대해 ‘phagocyte(식세포)’라는 이름을 붙였다. ‘먹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phagein과 ‘세포’를 뜻하는 그리스어 cyte로 만든 조어다. 이 소식이 러시아에 알려지면서 메치니코프의 유명세는 더 높아졌고 이듬해 오데사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한 메치니코프는 새로 설립하는 미생물학연구소를 책임지게 됐다.

 

1886년 오데사박테리아연구소가 문을 열었고 메치니코프는 소장이 됐다. 연구소가 수행한 과제 가운데 하나가 루이 파스퇴르가 막 개발한 광견병백신을 환자들에게 적용하는 일이었고 이렇게 그와 파스퇴르의 인연이 시작됐다.


그러나 러시아에서의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내 덕분에 돈 걱정이 없었던 메치니코프는 연봉 3600루블을 전액 연구비로 기부하면서까지 조국의 과학발전에 기여하려고 했지만 고질적인 관료주의와 잘 나가는 사람에 대한 중상모략을 견디지 못하고 1887년 사임한다. 다시 유럽으로 온 메치니코프는 독일에 자리를 잡으려고 했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울적한 마음으로 독일을 떠나 프랑스 파리 파스퇴르연구소를 방문한 메치니코프는 파스퇴르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전설적인 과학자의 환대에 감동한 메치니코프는 충동적으로 연구소에 무보수로 일할 자리가 있느냐고 물었고 파스퇴르는 즉각 실험실을 꾸며 팀장으로 앉혔다. 메치니코프는 평생 파스퇴르의 은혜를 잊지 않았고 1916년 사망할 때까지 28년 동안 연구소에 헌신했다.


파스퇴르의 배려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저녁 모임 초청을 받은 메치니코프는 편한 자리라고 생각하고 보통 양복을 입고 갔는데 계단을 오르다보니 다들 연미복을 입고 있었다. 당황한 메치니코프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숙소로 돌아가려고 하려는데 저 멀리서 파스퇴르가 잠깐 있으라는 신호를 보내고 사라졌다. 잠시 뒤 다시 나타난 파스퇴르는 연미복을 보통 양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아마도 파스퇴르가 메치니코프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한 배경에는 독일 학계에 대한 적개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파스퇴르는 보불전쟁 패배로 독일에 당한 굴욕을 잊지 않았고 공교롭게도 발효 메커니즘을 두고 독일 과학자들과 첨예하게 맞서왔다.

 

그런데 메치니코프 역시 면역이론으로 독일과 맞서는 입장이었다. 독일에서의 구직이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한 이유다. 결과적으로 메치니코프는 파스퇴르를 이어 독일 학자들과 과학논쟁에 뛰어든 셈이다.


메치니코프와 독일 과학자들이 벌인 면역논쟁은 과학사에서 독특한 사례다. 각론은 틀린 게 많았지만 큰 줄기에서는 둘 다 맞았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 용어로 설명하면 메치니코프는 선천면역을 독일 과학자들은 획득면역을 발견한 것이다.

 

세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베르트 코흐 등장으로 미생물학을 이끄는 독일 과학계는 우리 몸에 아메바 같은 세포가 있어서 병균을 잡아먹는다는 메치니코프의 설명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런 와중에 독일의 과학자들은 오늘날 적응면역으로 불리는 면역현상을 발견했고 이를 바탕으로 메치니코프의 학설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사실 파스퇴르 역시 적응면역에 속하는 업적인 광견병백신을 개발했지만 당시는 그 메커니즘을 몰랐기 때문에 독일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메치니코프를 적극 지원했다. 아무튼 양 진영은 면역계의 실체를 두고 거의 20년을 다투었고 결국 둘 다 맞다는 식으로 논쟁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1908년 양진영을 대표하는 메치니코프와 독일의 파울 에를리히가 노벨생리의학상을 공동수상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에를리히는 공동수상에 대해 불만이 많았는데 자신의 업적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 적응면역의 실체, 즉 항체가 항원(병원체)에 대응하는 메커니즘이 점차 밝혀지면서 면역은 사실상 적응면역을 의미하게 됐다. 이런 관점은 지난세기 말까지도 계속됐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메치니코프는 1882년 선천면역의 하나인 식작용을 처음 발견했다. 그의 저서 ‘감염질환의 면역’에 실린 그림으로 기니피그의 대식세포 안에 대장균(빨간색)이 들어 있다. - 감염질환의 면역 제공
메치니코프는 1882년 선천면역의 하나인 식작용을 처음 발견했다. 그의 저서 ‘감염질환의 면역’에 실린 그림으로 기니피그의 대식세포 안에 대장균(빨간색)이 들어 있다. - 감염질환의 면역 제공

노인학의 창시자


한편 면역논쟁이 가라앉을 무렵 면역연구에 대한 메치니코프의 관심도 점차 사그라졌다. 계기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시작됐다. 1890년대 들어 건강이 점점 나빠진 파스퇴르는 결국 병이 깊어져 칩거하게 된다. 메치니코프는 주말마다 파스퇴르를 방문해 말동무를 해줬는데 나날이 수척해지는 모습에 깊이 절망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50대로 접어들던 메치니코프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고 결국 ‘인간은 왜 늙을까?’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품게 된다. 훗날 메치니코프는 ‘노인학(gerontology)’라는 용어를 만들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노화연구에 뛰어든 메치니코프는 흥미로운 사실을 깨닫는다. 동물의 수명 데이터를 비교하다 포유류가 비슷한 크기의 조류에 비해 수명이 훨씬 짧다는 패턴을 발견했다. 당시 널리 받아들여지는 학설은 수명이 덩치와 비례한다는 가설이었다(수명의 대사율 가설로 지금도 유력한 이론이다).

 

기존 가설이 설명하지 못하는 현상에 대해 메치니코프는 기발한 해결책을 제시했는데, 바로 장내미생물이 수명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이었다. 즉 대장에 살고 있는 미생물들이 독소를 생성해 숙주에게 질병을 일으키고 노화를 가속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류의 경우 대장이 거의 퇴화된 상태라 장내미생물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조류는 오래 산다는 것이다.


메치니코프는 이 발견을 자신의 삶에 적용했다. 즉 미생물의 섭취를 최소화하기 위해 물도 끓여 마셨고 모든 음식은 조리해 먹었다. 그리고 주위에도 식습관을 바꾸라고 적극 홍보했다. 놀랍게도 그의 상상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메치니코프는 장내미생물 대다수가 인체에 유해하지만 가끔은 유익한 미생물도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대표적인 예로 유산균을 들었다. 즉 유산균 발효 제품에서는 전형적인 부패를 일으키는 다른 세균들이 잘 자라지 못하는데, 이런 현상이 장속에서도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 동물을 대상으로 한 실험 결과 그렇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메치니코프는 “똑같은 콜레라균에 감염되고 누구는 멀쩡하고 누구는 죽는 건 장내미생물의 조성차이 때문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지금 생각하면 놀라운 선견지명이다.


이런 와중에 스위스의 연구진이 불가리아의 장수촌에서 많이 먹는 요거트라며 견본을 보내왔다. 이에 흥미를 느낀 메치니코프는 연구자들에게 요거트에 사는 미생물을 규명하게 했고 마침내 탁월한 유산균인 ‘불가리아 간균’을 발견한다.

 

한편 메치니코프는 전통적인 요거트의 경우 다른 균도 섞여 있으므로 일단 우유를 끓여 살균한 뒤 여기에 순수 배양균을 접종해 요거트를 만들라고 제안했다. 물론 그 자신 이렇게 만든 요거트를 매일 먹었다.


1904년 6월 8일 메치니코프는 파리에서 행한 한 대중강연에서 그때까지의 연구결과를 알기 쉽게 소개했다. 언론들은 “장수하려면 요거트를 먹어라고 메치니코프 박사가 말했다!”는 식으로 강연내용을 대서특필했고 전세계로 타전됐다.

 

업계는 이런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고 마침내 발효유 산업이 태동했다. 즉 배양한 미생물을 적용한 요거트 제품이 시장에 나오게 된 것이다. 국내 한 업체가 자사 제품에 메치니코프의 이름을 쓴 게 다 이유가 있다.

 

 

자신의 죽음이 더 안타까웠던 이유


메치니코프는 “좋은 유산균을 꾸준히 섭취해 나쁜 균을 통제하면 150살까지 살 수 있다”고 얘기했지만 정작 본인의 건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즉 신장에 문제가 생겼고 심장에도 이상 신호가 왔다.

 

1915년 12월 감기에 걸린 뒤 후유증으로 건강이 급격이 나빠지면서 결국 회복하지 못했다. 죽음을 앞둔 메치니코프를 더 괴롭게 한 건 자신의 죽음이 곧 자신의 가설에 대한 ‘반증’으로 작용할 거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즉 다른 미생물의 섭취는 억제하고 유산균을 많이 먹으면 150년을 살 수 있다며 자신이 20년 가까이 엄격하게 실천하고 있었는데 그 절반도 못되는 나이에 죽게 생겼기 때문이다. 실제 메치니코프의 사후 그런 식의 기사가 여럿 나왔다.


메치니코프는 당시로는 드물게 대중에게도 꽤 인기가 많은 과학자였지만 세상을 떠난 뒤 오래지 않아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항원항체 메커니즘으로 적응면역이 곧 면역계로 인식이 된 데다 항생제의 발견으로 유산균이 할 일을 없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발효유 업계에서는 유산균이 중요하다고 꾸준히 주장했지만 큰 설득력은 없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20세기 후반 들어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먼저 선천면역계의 중요성이 재발견됐다. 적응면역이 정교한 체계이기는 하지만 침입자에 대한 대응을 준비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선천면역계가 몸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그 과정 역시 매우 정교하고 선천면역계에 이상이 있을 경우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천면역과 적응면역이 분리된 게 아니라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한편 장내미생물 역시 21세기 들어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메치니코프 시절 반짝한 이 분야의 발전이 지지부진했던 건 장내미생물 가운데 배양할 수 있는 종류가 극히 제한돼 있어 제대로 연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게놈 해독 기술이 급격히 발전하면서 배양을 하지 않고도 시료에 존재하는 수백 종의 미생물을 한꺼번에 규명할 수 있게 됐다.

 

그 결과 장내미생물에 대한 놀라운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물론 메치니코프의 연구는 유산균에 국한된 것이었지만 대장을 미생물의 생태계로 파악한 그의 철학은 여전히 유효하다. 루바 비칸스키는 아래 문구로 책을 마무리했다.


“일리야 메치니코프가 죽은 지 한 세기가 지났지만, 그의 미래는 여전히 그의 앞에 놓여 있을 것이다.”

 

 

※ 필자소개
강석기. 서울대 화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지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4권, 2012~2015),『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2014)가 있고, 옮긴 책으로 『반물질』(2013), 『가슴이야기』(201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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