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꽃, 그 붉은 아름다움의 비밀

2016.05.30 17:00

거기 화단 가득히 양귀비가 피어 있었다. 그것은 경이(驚異)였다. 그것은 하나의 발견이었다. 꽃이 그토록 아름다운 것인 줄은 그때까지 정말 알지 못했었다.
- 법정, ‘무소유’에서


2001년 이무렵 필자는 남프랑스 그라스(Grasse)에 있었다. 그라스는 향료의 메카로 독일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의 무대이기도 하다. 그라스를 포함해 프로방스 지역은 향료 식물 재배지로도 유명한데 특히 그라스의 장미와 자스민은 최고의 향료원료로 명성이 자자했다. 물론 지금은 인건비 등 여러 요인으로 상업적 재배는 미미하지만 관광자원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즉 그라스에서는 매년 5월에는 장미축제가, 7월에는 자스민축제가 열린다.

 

필자는 2001년 5월 프랑스 그라스를 방문했다. 당시 장미축제 기간이라 시내 곳곳이 장미로 장식됐다. 향료박물관 앞마당에는 향료용 장미의 꽃잎이 잔뜩 쌓여있어 주위를 달콤한 향기로 가득 채웠다. - 강석기 제공
필자는 2001년 5월 프랑스 그라스를 방문했다. 당시 장미축제 기간이라 시내 곳곳이 장미로 장식됐다. 향료박물관 앞마당에는 향료용 장미의 꽃잎이 잔뜩 쌓여있어 주위를 달콤한 향기로 가득 채웠다. - 강석기 제공

인구 4만의 작은 도시라서 그런지 장미축제도 생각보다 규모가 소박했다. 하지만 시내 곳곳에 각종 품종의 장미를 조형미 있게 잘 배치해놔서 있는 내내 즐거웠다. 특히 향료박물관 정문 옆에 깔아놓은 보자기에는 ‘오월의 장미’로 불리는 향료용 장미의 분홍색 꽃잎이 잔뜩 쌓여 있었다. 다가가보니 꽤 강한 장미향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토록 균형 잡힌 장미향을 꽃잎 가까이 코를 대지 않은 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때가 유일했다. 


하루는 그라스 인근에 야생으로 자라는 허브를 보러 갔다. 천문대가 있는 해발 1000m 고지 청정지역에서 자라는 라벤더와 타임은 평지에서 대규모로 재배하는 식물체보다 개체 크기도 작고 드문드문 분포해 있어 수확하는 일이 쉽지 않아 보였다. 프랑스산 야생 라벤더와 타임 정유가 비싼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오가는 길 들판 곳곳에 꽃잎 색이 너무나 선명하게 빨간 꽃들이 군데군데 피어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단순한 형태의 꽃잎 서너 장으로 된 꽃으로 꼭 속이 반쯤 비치는 선물 포장용 종이로 만든 조화처럼 보였다. 무슨 꽃이냐고 물어보니 양귀비란다. 문득 클로드 모네의 작품 ‘양귀비’가 떠올랐다. 모네는 이런 풍경을 보고 캔버스에서 붉은 물감을 점점이 뿌린 것처럼 양귀비꽃밭을 묘사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꽃이 이렇게 매혹적이었다니.


당나라 현종의 애첩 양귀비를 따 꽃의 이름을 지었다지만 사실 그때까지 필자는 식물 양귀비 하면 아편을 떠올렸을 뿐 왜 이 식물에 절세미인의 이름을 붙여줬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모양과 색, 향 모두에서 균형을 보이는 장미의 우아한 기품에서 ‘꽃의 여왕’이라는 문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듯이, 다른 건 볼품없고 오로지 꽃잎 자체의 매혹만으로 모든 것을 거는 식물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절세미인을 떠올린 것 역시 필연적인 귀결이 아니었을까.

 

요즘 과천 서울대공원 가는 길에 있는 개양귀비밭은 꽃이 만발했다. 붉은 양귀비꽃 사이에 드문드문 변이체로 보이는 흰 양귀비꽃이 보인다. - 강석기 제공
요즘 과천 서울대공원 가는 길에 있는 개양귀비밭은 꽃이 만발했다. 붉은 양귀비꽃 사이에 드문드문 변이체로 보이는 흰 양귀비꽃이 보인다. - 강석기 제공

지난주 과천 서울대공원에서 열리고 있는 장미축제를 보러갔다. 여러 나라에서 개발한 다양한 품종의 장미들이 저마다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다만 사람들이 너무 많고 날도 좀 더워 차분히 감상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장미정원 가는 길에 양귀비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한 2000~3000m2에 이르는 꽤 넓은 공간을 활짝 핀 양귀비가 꽉 채우고 있었다. 장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정말 장관이었다. 문득 15년 전 그라스가 떠올랐다.


사실 모네가 그리고 필자가 그라스와 과천에서 본 양귀비는 당나라 현종의 그 양귀비(학명 Papaver somiferum, 아편이 나옴)가 아니다. 같은 속으로 분류되는 개양귀비(학명 Papaver rhoeas)로 아편을 만들지 않아 관상용으로 재배되고 있다(법정 스님이 본 꽃도 개양귀비일 것이다). 필자는 아직 (아편)양귀비꽃 실물을 보지 못했다.


흥미롭게도 개양귀비 역시 미인과 인연이 있어 우미인초(虞美人草)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즉 초나라 항우가 죽자 그 애첩인 우희(虞姬)도 자결을 했고 우희의 무덤에 핀 꽃이 바로 개양귀비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 양귀비속(屬) 꽃들의 자태에는 남심(男心)을 홀리는 뭔가가 있는가보다.

 

꽃잎의 색은 빛의 흡수와 반사, 투과의 효과가 종합된 결과다. 그림은 꽃잎의 앞면(adaxial side. 꽃을 오므렸을 때 안쪽)에 빛이 들어왔을 때(I) 경로를 보여준다. 꽃잎을 이루는 세포의 구조에 따라 반사(R)와 투과(T)가 일어난다. - 영국왕립학회보 B 제공
꽃잎의 색은 빛의 흡수와 반사, 투과의 효과가 종합된 결과다. 그림은 꽃잎의 앞면(adaxial side. 꽃을 오므렸을 때 안쪽)에 빛이 들어왔을 때(I) 경로를 보여준다. 꽃잎을 이루는 세포의 구조에 따라 반사(R)와 투과(T)가 일어난다. - 영국왕립학회보 B 제공

빛의 흡수와 반사, 투과로 색 결정돼


학술지 ‘영국왕립학회보 B’ 최근호에는 다양한 식물의 꽃잎 색상이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광학의 관점에서 해석한 논문이 실렸다. 화훼의 나라인 네덜란드의 흐로닝언대 연구자들은 개양귀비를 포함해 속씨식물 23과 39종을 대상으로 꽃잎의 광학적 특성을 조사했다.

 

얼핏 생각하면 꽃잎의 색이라고 특별할 건 없다. 즉 꽃잎의 세포에는 빛에서 특정 파장대를 흡수하는 색소가 분포해 들어온 빛의 일부를 흡수할 것이고 나머지 빛이 반사돼 꽃잎의 색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논문을 보니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즉 꽃잎 표면에 도달한 빛 가운데 일부가 색소가 흡수된 뒤 나머지가 다 반사되는 게 아니라 일부는 투과돼 반대쪽 표면으로 빠져나가기도 한다. 즉 꽃잎의 두께나 내부 구조에 따라 반사되는 비율과 투과되는 비율이 결정된다. 빛이 많이 투과되는 꽃잎은 뒤가 비친다는 말이다(뒷면에서 들어오는 빛이 앞면으로 투과돼 나오므로).


연초에 집에서 키우는 동백이 처음으로 꽃을 피워 기념으로 그려봤는데, 당시 꽃잎 두 장이 겹친 부분이 어두운 걸 묘사하는데 신경을 썼다. 창가에 둬 약간 역광이라 그런 효과가 더 두드러졌던 것 같다(꽃잎 뒷면에 닿는 빛의 양이 더 많으므로).

 

꽃잎은 얇기 때문에 대부분의 식물에서 반사되는 빛보다 투과되는 빛이 더 많다. 이 효과는 역광, 즉 꽃잎의 뒷면에 닿는 빛이 더 많을 때 잘 드러난다. 그 결과 꽃잎이 한 장인 부분과 두 장 이상이 겹친 부분이 확연하게 구분된다. 지난 초봄 필자는 동백꽃을 그리며 이 효과를 묘사해봤다. (캔버스에 유채(부분)) - 강석기 제공
꽃잎은 얇기 때문에 대부분의 식물에서 반사되는 빛보다 투과되는 빛이 더 많다. 이 효과는 역광, 즉 꽃잎의 뒷면에 닿는 빛이 더 많을 때 잘 드러난다. 그 결과 꽃잎이 한 장인 부분과 두 장 이상이 겹친 부분이 확연하게 구분된다. 지난 초봄 필자는 동백꽃을 그리며 이 효과를 묘사해봤다. (캔버스에 유채(부분)) - 강석기 제공

논문에는 39종의 꽃잎에서 빛의 파장에 따른 흡수와 반사, 투과 정도를 보여주는 스펙트럼 데이터가 있다. 그 가운데 네 종에 대한 데이터가 앞에 견본으로 소개돼 있는데, 맨 아래 개양귀비가 보인다. 예상대로 가시광선의 짧은 파장과 중간파장의 흡수도가 꽤 높고 긴 파장은 거의 흡수하지 않는다(그래프에서 파란색 선). 그 결과 반사되거나(녹색 선) 투과되는(빨간색 선) 빛 대부분은 긴 파장이다. 개양귀비가 선명한 붉은색인 이유다.


그런데 스펙트럼을 자세히 보면 반사도보다 투과도가 더 크다. 물론 양귀비는 꽃이 꽃대 위로 솟아 식물체 맨 위에 있기 때문에 꽃잎 양면으로 비슷한 양의 빛이 도달하고 따라서 눈에 보는 색은 반사된 빛과 투과된 빛이 합쳐진 것이므로 큰 문제는 아니다. 아무튼 대부분의 꽃에서도 반사도보다 투과도가 더 큰 이유는 꽃잎 두께가 얇기 때문이다. 39종을 보면 가장 두꺼운 게 개연꽃(학명 Nuphar lutea)으로 419마이크로미터(㎛)다. 가장 얇은 건 75㎛로 개양귀비 꽃잎이다. 참고로 보통 두께의 종이가 대략 100㎛ 내외다. 투과도를 낮추려면 꽃잎을 두껍게 하면 되지만 그럴 경우 비용(자원)이 많이 들고 꽃이 클 경우 식물체가 무게를 감당하기도 어렵다(특히 풀인 경우).

 

파장에 따른 빛의 투과도(빨간색 곡선)와 반사도(녹색), 흡수도(파란색)을 나타낸 그래프다. 위로부터 수박꽃, 보리지, 달맞이꽃, 개양귀비다. 개양귀비꽃잎의 선명한 붉은색은 가시광선의 짧은 파장과 중간 파장 대부분을 흡수하기 때문이다. - 영국왕립학회보 B 제공
파장에 따른 빛의 투과도(빨간색 곡선)와 반사도(녹색), 흡수도(파란색)을 나타낸 그래프다. 위로부터 수박꽃, 보리지, 달맞이꽃, 개양귀비다. 개양귀비꽃잎의 선명한 붉은색은 가시광선의 짧은 파장과 중간 파장 대부분을 흡수하기 때문이다. - 영국왕립학회보 B 제공

색소 분포 패턴 달라


빛의 흡수는 물론 색소의 종류와 양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요소가 더 있으니 바로 색소의 분포다. 즉 꽃잎을 이루는 세포들 가운데 어디에 색소가 존재하느냐에 따라 꽃잎의 색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꽃잎을 이루는 세포 모두에 균일하게 색소가 분포할 줄 알았던 필자로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아래 이미지들은 꽃잎의 단면 현미경사진으로 색소가 균일하게 분포하는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왼쪽 달맞이꽃은 균일하게 분포하지만 가운데 울타리콩은 양쪽 표피의 세포 한 층씩에만 색소가 분포한다. 오른쪽 안데스물망초의 경우는 위층(앞면)에만 색소가 있다.

 

꽃잎의 단면 사진을 찍어보면 색소 분포가 세 가지 패턴 가운데 하나를 보인다. 즉 전체적으로 퍼져 있거나(왼쪽 달맞이꽃) 양쪽 표면세포에만 존재하거나(가운데 울타리콩) 앞면에만 존재한다(오른쪽 안데스물망초). 색소를 만드는데는 자원이 들어가기 때문에 식물의 입장에서 최선인 배열이 선택된다. - 영국왕립학회보 B 제공
꽃잎의 단면 사진을 찍어보면 색소 분포가 세 가지 패턴 가운데 하나를 보인다. 즉 전체적으로 퍼져 있거나(왼쪽 달맞이꽃) 양쪽 표면세포에만 존재하거나(가운데 울타리콩) 앞면에만 존재한다(오른쪽 안데스물망초). 색소를 만드는데는 자원이 들어가기 때문에 식물의 입장에서 최선인 배열이 선택된다. - 영국왕립학회보 B 제공

색소 분포 가능성은 이 밖에도 두 가지가 더 있는데, 뒷면에만 있는 경우와 가운데층에만 있는 경우다. 그런데 자연계에 이런 예는 없다고 한다. 빛 가운데 상당 비율이 색소층에 닿기도 전에 사라지므로(반사로 인해) 선별적인 파장대 흡수라는 색소 존재 이유가 약화되기 때문이다.


논문에 따르면 앞면에 색소가 분포할 때 색소의 효율이 가장 높게 발휘될 수 있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든 게 히비스커스속에 속하는 수박풀(학명 Hibiscus trionum)이다. 참고로 무궁화도 히비스커스속이다. 수박풀의 꽃잎은 대부분 흰색이지만(즉 색소가 없다) 수술과 암술 주위로는 짙은 자주색이다. 이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자 앞면 한 세포층에만 자주색 색소가 잔뜩 들어있다. 연구자들은 논문에서 “색소를 만드는 건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기 때문에 식물에 따라 수분곤충을 끌기에 적합한 배치로 진화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무궁화 같은 다른 히비스커스속처럼 수박꽃 역시 꽃잎 대부분은 흰색이고 암술과 수술을 둘러싼 부분만 짙은 자주색이다. 꽃잎의 단면을 보면 이 부분의 앞면 표층세포에 색소가 집중적으로 분포해 있다. - 영국왕립학회보 B 제공
무궁화 같은 다른 히비스커스속처럼 수박꽃 역시 꽃잎 대부분은 흰색이고 암술과 수술을 둘러싼 부분만 짙은 자주색이다. 꽃잎의 단면을 보면 이 부분의 앞면 표층세포에 색소가 집중적으로 분포해 있다. - 영국왕립학회보 B 제공

그런데 논문 어디를 봐도 개양귀비 꽃잎의 색소분포에 대해 말이 없다. 아쉬운 마음에 논문의 주저자이자 교신저자인 캐스퍼 반 데르 쿠이(Casper van der Kooi) 박사에게 문의를 했다. 필자 생각에 울타리콩처럼 양쪽 표피층에 분포할 것 같다고 언급하면서. 현재 스위스 로잔대에 있는 반 데르 쿠이 박사는 바로 답신을 보내왔는데 “시도했지만 실패했다”는 내용을 다소 장황하게 설명했다. 양귀비꽃에는 정말 남자들의 마음을 산란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래는 반 데르 쿠이 박사의 답신 전문이다. 


“개양귀비에 대한 당신의 질문은 흥미로운 것이다. 우린 이 종에서 색소의 분포 유형을 알아내려고 했지만 두 가지 이유로 실패했다. 1) 꽃잎이 너무 얇았다(불과 몇 개의 세포로 이뤄져 있다). 따라서 깔끔하게 절단한 단면을 얻기가 매우 어렵다. 2) 꽃잎에 색소가 엄청나게 많다(논문의 흡수스펙트럼에서 볼 수 있듯이). 절단면을 만들 때 색소가 세포 밖으로 빠져나가 꼭 피를 흘리는 것처럼 됐다. 그 결과 사진이 뭉개졌다. 그럼에도 이 종의 경우 색소의 분포가 그 자체로 큰 의미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종의 경우 꽃잎이 겨우 세 층 내외의 세포로 이뤄져 있어서 각 층이 시각 신호에 기여를 할 것이다. 즉 색소가 두 층에만 있든(필자의 추측) 세 층에 다 있든 차이는 미미할 것이다(다른 꽃들은 그렇지 않다). 이 꽃은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특별할 뿐 아니라 해부학적으로도 예외적인 존재다!(This flower is not only special because it’s beautiful, also it’s anatomy is exceptional!)” 

 

 

※ 필자소개
강석기. 서울대 화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지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4권, 2012~2015),『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2014)가 있고, 옮긴 책으로 『반물질』(2013), 『가슴이야기』(201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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