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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꽃, 투표는 누구를 위한 디자인인가

2016년 05월 04일 20:00

4월 13일 대한민국은 20대 총선을 치렀고 16년 만에 ‘여소야대’ 라는 권력 재편이 이뤄냈다. 그 뒤 민심의 향방부터 차세대 대선 주자에 대한 전망까지 이런저런 정치적 해석이 쏟아져 나왔다. 또한 선거 준비 과정 속에서 두 주요 야당 간의 후보 단일화가 정치 이슈가 되곤 했다. 실제 몇 선거구에서는 막바지에 극적으로 합의를 통해 후보를 단일화 하기도 했다.

 

● 선거 용지가 인쇄된 뒤에는 후보단일화도 무용지물


필자의 전문 분야가 UI/UX 및 서비스 경험의 디자인인 만큼 이번 선거에서도 국민의 투표권이 실제 행해지는 투표소와 투표 용지에 자연스레 관심이 갔다. 투표소와 투표용지는 ‘선거’라고 하는 대국민 서비스의 UI에 해당한다. 특히 투표 용지는 국민의 투표권이 실제적으로 행사되는 가장 중요하고 민감한 접점이다.


필자가 특히 주목한 건 막바지에 후보 단일화가 된 선거구에 들어가는 투표 용지였다. 투표 용지가 인쇄된 이후에는 후보 단일화가 되더라도 투표 용지에 사퇴한 후보 이름이 그대로 남아있어 사표가 될 가능성이 많아진다. 실제로 지난 2014년 서울 동작을 재보선 선거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 여당 후보는 929표 차이로 승리했었는데 투표 용지 인쇄 이후에 단일화 합의로 사퇴한 야당 후보에게 주어진 표가 1180표 였다고 한다. 당락을 결정한 표보다 더 많았던 것이다.   


이러다보니 후보 단일화가 필요한 정당에서는 투표 용지 인쇄의 시점을 후보 단일화 디데이(D-day)로 본다. 특히 여러 사정상 조기 인쇄에 들어간 지역구에서는 아래 기사의 내용처럼 정치적으로 더욱 민감해 질 수 밖에 없다.  


☞ 더민주 “투표용지 조기 인쇄 안돼…후보 단일화 방해하나” (동아일보 2016.3.30)


필자는 이 칼럼에서 투표 제도의 정치공학을 논하려는 건 아닌 만큼 정치적 해석은 피하고 투표 용지의 UI적인 관점만 살펴보고자 한다. UI 분야의 구루로 추앙받는 제콥 닐슨이 주창한 UI 디자인의 8개의 원칙(☞ 8 Heuristics for User Interface Design)에 보면 ‘오류 방지’에 대한 항목이 있다. 세심한 UI 디자인을 통해 사용자가 저지르기 쉬운 오류를 사전에 방지하라는 내용의 원칙이다. 특히 “오류를 유도할 여지가 있는 조건을 제거하라(eliminate error-prone conditions)”는 조언이 들어 있다.


이 원칙에 의거하여 볼 때 사퇴한 후보의 이름이 여전히 인쇄되어 나오는 투표 용지는 변명의 여지 없이 오류를 유도할 여지가 있는 나쁜 UI 디자인이다. 수백만 부 수의 조간 신문도 매일같이 찍어 전국에 배달되는데 투표 전날 또는 당일 자정부터 투표 용지를 인쇄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걸까. 전기 자동차가 등장하고 인공지능이 바둑의 신 이세돌을 이기는 21세기 첨단 기술 사회에서 말이다.


물론 인쇄 업체와의 계약부터 해서 인쇄 업무 과정에서 분명 그럴 사유가 있긴 할 것이다. 일을 해 본 사람은 누구나 느끼듯이 자칫 쉬워 보이는 업무도 사실 여러 단계의 절차, 규제, 정책에 따라 복잡하게 돌아가는 게 일상다반사 이니까. 그러나 그런 사유가 국민의 신성한 권리인 투표권이 무효가 되어 버리는 사태보다 더 중요한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 2000년 미국 대선, 공급자 위주 UI가 만든 선거 결과


언제 다른 칼럼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인데 이런 사고방식과 태도를 ‘공급자 위주의 서비스’ 라고 표현한다. 즉 서비스 수혜자의 편의가 아니라 제공자가 업무를 처리하기 편리하게만 서비스를 만드는 행태를 말한다. 민원 처리 하려고 정부 기관에 갔을 때 알아듣기 힘든 용어와 함께 “2층 어디 가서 이렇게 하고 나서 3층 어디 가서 저렇게 한 다음 다시 어느 웹사이트에 들어가 어떻게 하시라" 같은 머리에 쥐나는 설명을 들은 경험이 있는가? 그때 ‘무슨 똥개 훈련 시키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 편한 대로만 해놨네’ 라며 투덜거렸다면, 당신은 국민 편의를 고려하지 않고 공무원의 편한 업무 처리에만 신경 쓴 ‘공급자 위주의 공공 서비스’에 희생양이 된 것이다. 투표 용지 인쇄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공급자 위주의 서비스 행태인 셈이다.       


그럼 투표 용지 UI가 실제로 매우 심각한 정치적 사건을 만들어 낸 적이 있을까? 있다! 그것도 지구 상에 가장 중요한 정치 선거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사건이 터졌었다. 조지 부시 공화당 후보와 앨 고어 민주당 후보가 붙은 2000년 대선에서 실제로 투표 용지가 문제를 일으켜 대통령 당선의 확정이 연기되고 양 후보 간에 법정 싸움까지 가는 미국 정치상 전무후무한 대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최대의 격전지는 플로리다였다. 미국의 대통령 선출 제도는 대한민국과 달리 인구 비례에 따라 각 주에 할당된 선거인단의 수를 그 주에서 득표를 가장 많이 한 후보자가 독식하는 방식이다. 플로리다를 뺀 나머지 주에서 고어는 총 255명, 부시는 245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한 상태였다. 따라서 25명의 선거인단을 가지고 있는 플로리다 주의 결과에 따라 당락의 운명이 정해질 판세였다. 투표 완료 후의 최종  결과는 부시 측이 1784 표로 앞선 거였는데 그 차이가 0.5% 미만이라 플로리다 주의 법에 따라 다시 자동 재검표를 진행하였다. 재검표의 결과 327표로 차이가 줄어들었다.


그 과정에서 팜비치(Palm Beach)란 지역이 특히 쟁점이 되었다. 팜비치는 전통적으로 민주당 강세 지역임에도 생각보다 알 고어 후보의 표가 매우 적게 나왔다. 그런데 조사 결과 또 다른 후보였던 팻 뷰캐넌이란 후보자에게 이상하리만치 많은 표가 몰려 있었다 (다른 지역에 비해 무려 세 배나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팜비치에서 사용되었던 투표 용지가 아주 묘하게 디자인 되어 있었다.

 

이미지 확대하기2000년 대선 당시 팜비치 카운티에서 쓰인 투표 용지
2000년 대선 당시 팜비치 카운티에서 쓰인 투표 용지 - Anthony(W) 제공

소위 나비(butterfly)형 이라 불렸던 이 투표 용지를 잘 살펴보자. 1번 후보인 조시 부시에게 투표 하려면 용지 가운데의 첫 번째 구멍을 택하면 된다. 그러면 2번 후보인 앨 고어를 찍으려면 두 번째 구멍을 택하면 된다…. 라고 하면 여러분도 이미 뷰캐넌 후보에게 잘못 투표해 버리는 것이다. 2번 후보인 고어는 세 번째 구멍에 지정되어 있고 두 번째 구멍은 뷰캐넌 후보용 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각 구멍에는 3번 부터 시작하는 의미없는 - 또는 혼동을 일으키는 - 숫자들이 화살표로 구멍을 가리키고 있다.  


이 투표 용지를 놓고 당시 부시 캠프의 대변인은 “원래 팜비치는 뷰캐넌이 강세를 보인 곳 아닌가” 라고 주장했지만 심지어 당사자인 뷰캐넌조차 “난 그런 말을 내 캠프에서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언론을 통해 반박할 정도였다. 팜비치의 이 애매모호한 투표 용지와 조사를 통해 나온 기타 다른 문제들로 플로리다의 투표 방식과 제도에 대해 한동안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다. 특히 당시 플로리다의 주지사가 부시 후보의 친동생인 젭 부시였던지라 각종 정치적 음모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아무튼 미국 연방 법원은 부시를 당선자로 최종 선고하였다.    


팜비치의 투표 용지가 교활한 정치적 음모가 담긴 고의적 디자인이었든 아니면 단순한 실수였든 그건 중요치 않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런 디자인 실패로 인해 신성한 국민의 권리인 투표권이 모욕 당했다는 점이다. 분명히 보다 쉽고 직관적이면서 오류를 방지하는 투표 용지를 만들어 사용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수능시험용 OMR 답안지 같은 것에서도 비슷한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반드시 컴퓨터용 싸인펜으로 반드시 정확한 원에 반드시 원 안으로만 잘 칠해야 하는 기술(?)은 시험 공부를 위해 그간 쌓은 지식 과는 아무 상관없는, 그저 공급자 측의 편의를 위해 서비스 수혜자가 수고해야 하는 불편한 UI일 뿐이다. 학생이 그간 열심히 공부한 노력을 최대한 문제 풀이에 집중할 수 있도록, 국민이 바쁜 일상 속에서 몸소 투표소까지 방문하여 지지하는 후보에게 투표권을 잘 행사할 수 있도록, 제발 서비스 이용자를 고려한 보다 훌륭한 UI를 만들어 보자. 

 

 

※필자소개

김성우.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대학원 인터랙션 디자인 교수. “기술 너머의 철학 (Philosophy beyond Technology)”을 추구하는 경험 디자인(Experience Design)의 구도자로 경험 생태계, 기업의 전략적 UX 경영, 공공 서비스 디자인, 차세대 콘텐츠 경험 등을 연구한다. 다학제적 융합과 통섭이 요구되는 경험 디자인을 업으로 삼다보니 자연스레 국내외의 다양한 분야에서 공부와 현업을 통해 전문성을 쌓아왔다. 미국 실리콘 벨리에서 UI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국내에선 삼성전자와 KT에서 UX 연구와 개발을 하였고, 싱가포르에서 필립스 디자인(Philips Design)의 UX 디자인 컨설턴트로도 근무하였다. 학부 및 대학원에서 컴퓨터 공학과 HCI (Human Computer Interaction)를 전공하였으며 현업 시절 UX 경영 공부를 목적으로 MBA 과정을 밟았다.

 

편집자주: 새로운 시대가 열리면서 주변에서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인체공학적, 사용자친화적…. 사람이 이용할 때 편리하고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을 통틀어 UI 혹은 UX 디자인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UI(User Interface)는 사용자가 대상물을 통해 과업을 수행하고자 할 때 조작하게 되는 부위와 조작의 결과로 나오는 대상물의 반응을 설계하는 분야, UX(User Experience)는 UI를 포함해 사용자가 어떤 대상을 접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인상과 느낌의 축적. UX 디자인은 그런 인상과 느낌을 설계하는 분야라는데, 대체 무엇이고 어디에 어떻게 적용되는 걸까요? 김성우 국민대 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의 칼럼으로 여러분의 궁금증을 풀어보세요~!


김성우 국민대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

caerang@kookmi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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