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과학, 스타일이 살아있네~

2016.02.23 17:00

2014년 위안부와 관련해 이상한 글을 발표해 지금은 정떨어졌지만 1990년대 국내 독서계에서 시오노 나나미의 인기는 대단했다. 1992년부터 매해 한 권씩 펴낸 ‘로마인 이야기’는 가히 열풍 수준이어서 일본에서 취재를 왔을 정도였다. 역사책은 잘 안 읽는 필자조차 3, 4권까지는 읽은 것만 봐도(2006년 15권으로 완결했다)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에세이집도 몇 권 냈는데, 그 가운데 ‘남자들에게’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한 20년 전 재미있게 읽었다는 건 기억이 나지만 내용은 다 까먹었다. 단 하나만 빼고. 필자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에세이는 제목이 ‘영국 남자에 압도당한 이탈리아 남자’로 이탈리아 여성과 영국 남성의 결혼식장 풍경을 그리고 있다.


유럽의 관례대로 신부의 집이 있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결혼식이 열렸는데, 다들 영화배우 얼굴에 패션의 고장에 사는 멋쟁이 이탈리아 남성들이 왠지 경직되고 보수적일 것처럼 보이는 영국 남성들을 압도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정작 식장에서 보니 영국 남성들은 연미복을 입고서도 각자 셔츠와 넥타이로 자기만의 멋을 한껏 부린 반면 이탈리아 남성들은 격식에 얽매여 셔츠와 넥타이까지 똑 같은 걸로 하고 있더라는 얘기다. 어찌 보면 별 것 아닌 에피소드를 지금까지 기억하는 것으로 보아 필자가 생각해온 영국인의 이미지가 깨진 게 참신했던가보다.


이 에세이는 ‘스타일’이라는 파트에 실려 있는데, 스타일이란 ‘그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그런 줄 아는 것이 스타일이다’라고 애매하게 정의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이란다. 즉 자기 내부에 강한 신념이 있어 ‘윤리, 상식 등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스타일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미국에서 미토콘드리아치환요법 긍정 보고서 나왔지만


오늘날 과학은 갈릴레오 갈릴레이 이후 유럽에 기반을 두고 있고 그 가운데서도 영국의 기여도가 압도적인데 문득 영국에 스타일이 있는 과학자들이 많아서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체의 질량과 운동에 대한 몇 가지 가정을 통해 고전역학을 창시하고 사실상 완성한 아이작 뉴턴, 각각 실험과 이론으로 전자기학을 세운 마이클 패러데이와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양자역학 수식으로 반물질이라는 정말 말도 안 되는 개념을 이끌어낸 폴 디랙이 떠오른다.


생물학 분야에서는 지금까지 과학이 인류에게 준 가장 큰 충격이라는 진화론을 개척한 찰스 다윈과 앨프레드 월리스가 있다. 원자론을 과학으로 부활시켜 근대화학의 기초를 쌓은 존 돌턴도 영국사람이다.


임상의학도 예외는 아니다. 이제는 보편화된 시험관아기를 처음 시도해 성공한 나라도 영국이다. 즉 동물유전학자 로버트 에드워즈와 부인학 전문의 패트릭 스텝토 박사의 노력으로 1978년 첫 시험관 아기 루이즈 브라운이 태어났고, 언론과 학계의 극렬한 비난을 감수하며 버틴 결과 이제는 전 세계에서 일상적인 시술법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 2월 3일 미국 의학연구소(IOM)는 미토콘드리아치환요법을 임상에 적용하는데 부분적으로 동의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2014년 미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타당성 검토를 의뢰받은 IOM은 남아를 대상으로 임상을 허용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미토콘드리아치환요법(mitochondria replacement therapy, 이하 MRT)은 소위 ‘세 부모 아기’를 만드는 기술이다.


즉 세포호흡(에너지 생산)을 담당하는 세포소기관인 미토콘드리아가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게놈(유전자가 37개에 불과하다)에 변이가 생겨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면 여러 유전병으로 나타난다. 미토콘드리아는 모계유전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여성이 있는 낳은 딸은 본인도 문제가 있고 훗날 낳을 자식도 문제가 생긴다.


이때 난자 또는 수정란 상태에서 핵을 분리한 뒤 미토콘드리아 게놈이 정상인 난자에서 핵을 빼낸 뒤 여기에 집어넣어주면 미토콘드리아가 건강한 난자 또는 수정란으로 바뀐다. 다만 모계의 핵게놈과 미토콘드리아게놈의 수여자가 다르기 때문에 결국 아이는 엄마가 둘인 셈이다.


이번 보고서에 따르면 MRT 적용을 남아에게로 제안하고 있는데, 당대 이후로 유전되는 걸 막기 위한 조치다. 즉 MRT로 세 부모를 둔 남아가 훗날 자식을 보게 될 때 어차피 미토콘드리아는 정자에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MRT에 만에 하나 문제가 있을 경우라도 그 영향이 유전되지 않게 하는 안전책인 셈이다. 아무튼 이런 조치는 MRT를 적용하기 전에 정자 또는 수정체의 성별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는 뜻이므로 임상적 실효성이 의심된다는 얘기도 있다.

 

미토콘드리아치환요법의 개념도. 미토콘드리아 게놈에 문제가 있는 여성(왼쪽)이 이런 문제가 없는 아이를 낳기 위해 미토콘드리아 게놈에 문제가 없는 여성(오른쪽)의 탈핵한 난자에 자신의 핵을 넣은 뒤 수정을 시켜 자궁에 착상시키는 방법이다. 지난해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임상적용이 합법화돼 곧 적용될 예정이다. - 사이언스 제공
미토콘드리아치환요법의 개념도. 미토콘드리아 게놈에 문제가 있는 여성(왼쪽)이 이런 문제가 없는 아이를 낳기 위해 미토콘드리아 게놈에 문제가 없는 여성(오른쪽)의 탈핵한 난자에 자신의 핵을 넣은 뒤 수정을 시켜 자궁에 착상시키는 방법이다. 지난해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임상적용이 합법화돼 곧 적용될 예정이다. - 사이언스 제공

10년 동안 준비한 결과


사실 MRT의 임상 적용은 이미 1년 전 영국에서 승인받은 바 있다. 즉 2015년 2월 관련 법안이 영국 하원과 상원에서 잇달아 통과된 것. 게다가 미국처럼 남아에 제한하다는 규정도 없다. 즉 영국은 세계 최초로 미토콘드리아 게놈에 결함이 있는 여성이 임신을 하려고 할 때 MRT를 시도할 수 있게 허용한 나라다. 한편 우리나라 드라마의 단골소재인 친부모  소송을 원천차단하기 위해 미토콘드리아를 제공한 여성은 어머니로서 권리가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미국은 2년이나 고민해서 간신히 보고서 하나 내놨는데 영국은 너무 앞서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즉 영국 인간생식배아관리국(HFEA)이 MRT의 임상적용 검토를 시작한 건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때 필자는 MRT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다.


1990년 인간생식배아법률에 따라 보건부 산하 기관으로 설립된 HFEA는 2005년 뉴캐슬미토콘드리아연구센터에 “시험관아기기술에 기초해 미토콘드리아 유전질환을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을 검토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2011년부터 본격적으로 미토콘드리아 치환의 효용성과 안전성에 대한 검토에 들어갔다. 참고로 2008년부터 2014년까지 HFEA의 국장을 지낸 사람은 지난해 타계한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저술가인 리사 자딘이다(자딘의 삶과 업적에 대해서는 ☞[2015년 사라진 과학계 별들](19)생명윤리 정책에 영향을 준 역사학자 ‘리사 자딘’ 참조).


이런 과정을 거쳐 이 기술이 안전하다고 판단한 HFEA는 2012년부터 대중을 상대로 MRT의 사회적, 윤리적 함의를 논의했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의견수렴이 이루어져 마침내 입법화에 성공한 것이다. 해결해야할 세부 사항이 있어 최근에야 모든 걸림돌이 제거돼 이제 곧 본격적인 임상이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게놈 편집도 해봐!


한편 지난 2월 1일 HFEA는 또 다른 놀라운 발표를 했다. 인간배아를 대상으로 게놈편집을 허용한다는 내용이었다. 게놈편집은 학술지 ‘사이언스’의 2015년 10대 뉴스에서 당당히 1위로 뽑힌 혁신적인 생명공학기술로 소위 ‘유전자 가위’로 불리기도 한다. 게놈편집이 이렇게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게놈에 ‘흔적’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즉 작물이나 가축의 특정 유전자를 바꿔 특성을 변화시키면서도 GMO 논란을 피해갈 수 있고 부모의 유전자에 결함이 있을 경우 배아 상태에서 정상 유전자로 편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미래에는 맞춤형 아기가 태어날 것’이라는 예측기사가 있었는데 게놈편집기술이 등장하면서 정말 가능한 일이 됐다.

인간의 생식(reproduction)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두 기술인 미토콘드리아치환요법과 게놈편집에 영국이 가장 전향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사진은 인간배아다.  - Kathy Niakan 제공
인간의 생식(reproduction)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두 기술인 미토콘드리아치환요법과 게놈편집에 영국이 가장 전향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사진은 인간배아다.  - Kathy Niakan 제공


이처럼 게놈편집의 파급력이 워낙 크기 때문에 HFEA는 임상이 아니라 순수 연구 목적으로만 배아편집을 허용한다고 밝혔다. 즉 배아를 대상으로 게놈편집실험을 하고 성공여부를 확인한 뒤 바로 파괴해야 한다. HFEA에 실험 승인을 요청한 프랜시스크릭연구소 캐시 니아칸 박사는 승인이 떨어진 뒤 바로 실험에 착수할 예정이라고 한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겠지만 배아편집의 임상적용도 머지않아 허용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우리말에 “미리 싹을 밟아야한다”는 표현이 있는 것처럼 스타일이 있는 사람은 살아남기 힘든 풍토에서(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서구에서 스타일을 인정받는 경우다) 이런 논의들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는 영국이 그저 부럽기만 하다.


 

※ 필자소개
강석기. 서울대 화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지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4권, 2012~2015),『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2014)가 있고, 옮긴 책으로 『반물질』(2013), 『가슴이야기』(2014)가 있다.

메일로 더 많은 기사를 받아보세요!

댓글 0

작성하기

    의견쓰기 폼
    0/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