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는 블라인드 테이스팅, 물리학에는 ‘블라인드 인젝션’

2016.02.16 10:07

2월 11일. 정말 많은 사람이 유튜브를 통해 과학이 진보하는 현장을 지켜봤습니다. “우리가 중력파를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해냈습니다!”라고 레이저 간섭 중력파 관측소 ‘라이고(LIGO)’의 데이비드 라이츠 소장이 이 같이 말하자, 모두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발표를 보고 즐거워하면서 필자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사실 라이고가 블랙홀 한 쌍이 합쳐지면서 발생한 중력파를 처음 잡아낸 것은 2015년 9월 14일입니다. 발견에서 발표까지 거의 6개월이나 걸렸습니다. 힉스 발표 때도 그랬습니다. 세계를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발견을 목격하고 어떻게 6개월 이상 참을 수 있을까요?

 

LIGO 제공
LIGO 제공

 

 

물리학자들이 6개월을 참은 이유


물리학자들이 이렇게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복잡하게 설계된 실험일수록 결과를 검증하는 과정이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중력파 검출과 같은 이른바 ‘거대 과학(Big Science)’에 쓰이는 장치는 단순히 규모만 큰 것이 아니라 최신의 물리학과 공학의 성과가 집약된 최첨단 기기입니다. 검출기부터 데이터 수집 시스템까지 매우 정교하게 설계, 제작되고 또한 각 요소가 긴밀하게 연결돼야만 합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라도 실수가 발생하면 틀린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최근에도 그러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2011년 9월 23일 국제 중성미자 실험그룹 오페라(OPERA)가 발표한 빛보다 빠른 중성미자인 ‘초광속 중성미자’는 뼈아픈 선례로 남았습니다. GPS 수신기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케이블의 문제 때문에 중성미자의 관측 시각이 실제보다 60ns 가량 빠르게 측정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2012년에는 실험결과를 공식철회하고 책임자가 사임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와인과 중력파의 공통점은?


과학자들은 연구의 현장에서 측정의 오류를 줄이기 위해 엄청나게 고민을 합니다. 중력파를 검출한 라이고 역시 오류를 줄이고 관측 프로세스가 제대로 기능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독특한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바로 ‘블라인드 인젝션(blind injection)’이라는 방법입니다.


블라인드 인젝션을 와인 테이스팅라고 생각해보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세계 최고의 와인을 뽑는 현장을 본 적이 있나요? 유명한 소믈리에가 나와서 잔을 들고 라벨을 알 수 없는 와인의 맛을 봅니다. 숙련된 소믈리에는 맛을 감별하면서, 어떤 와인이 우수한지 가려냅니다. 선입견을 갖고 브랜드에 현혹되지 않으면서요.


라이고에서는 우주에서 들어온 진짜 중력파 신호 말고, 가짜 신호를 쐈다고 합니다. 실제 데이터에 전산상으로 가공한 데이터를 섞었다네요. 물론 가짜 신호가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연구자들에게 알리기는 했지만, 언제 가짜가 주입되는지는 소수의 연구 책임자 몇 명만 알았다고 합니다.


왜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일까요. 가짜 신호가 들어왔을 때 연구자들이 반응하는 것을 본다면, 라이고의 모든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동작하는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SW 프로그래밍에서 ‘디버깅’에 해당하는 작업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가짜’가 있었기에 ‘진짜’를 찾았다


연구 현장에 있는 과학자가 분석을 통해 ‘중력파를 발견했다’고 확신했는데, 그 신호가 가짜라면 얼마나 허탈할까요? 라이고에서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라이고에 따르면 2010년 9월 16일, (라이고에서도) 블라인드 인젝션이 이루어졌습니다.ᅠ‘지령’을 받은 팀내 ‘첩보원’이 이론 기반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그럴듯한 가짜 중력파 신호를 만들어 실제 데이터에 추가한 것입니다. 이 신호는 블랙홀 혹은 중성자별로 추정되는 두 천체가 합쳐지는 과정에서 발생한 중력파로 밖에 설명하기 어려운 결과였습니다.


관측팀과 분석팀은 흥분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겠지요. ‘블라인드 인젝션’, 즉 ‘가짜 신호’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몇 달간의 분석 끝에 프로젝트 구성원들은 관측 결과가 노이즈일 확률이 1% 미만이며, 우연이라면 7000년에 한번 꼴로 일어나는 수준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6개월 뒤 2011년 3월 14일. 진짜 신호인지 가짜인지 ‘봉인’이 풀린 순간, 라이고 소속 연구원들은 실망의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고 합니다. (현장 연구자들은 실제로 논문 투고 직전에야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블라인드 인젝션이라는 시험 과정을 통해서 라이고의 실험 시스템에 대한 연구자들의 믿음이 더욱 강해지지 않았을까요? 이러한 시련(?)을 통해 라이고를 업그레이드를 했을 겁니다.


결국 4년 뒤 정밀도가 초기보다 열 배 가까이 오른 라이고는 블랙홀 쌍의 병합 과정에서 발생한 중력파 측정에 성공했습니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가라. 라이고의 블라인드 인젝션은 역사적인 발견의 희열을 대중과 공유할 때까지, 과학자 집단이 본연의 신중한 자세를 유지하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로 꼽을 수 있습니다.

 

 

※ 필자 소개
김찬현. 오사카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동경대학 대학원에 진학해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프로젝트 중 하나인 반물질 합성 실험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SK 하이닉스에서 2011년에서 2015년까지 반도체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2015년에는 KAOS 재단 객원 에디터로 활동하며 <우주, 일상을 말하다>와 <죽기 전에 알아야 할 5가지 물리법칙>을 감수했다. 현재는 일본어 통번역가로 활동하며 과학의 대중화를 위한 일에 참여중이다. 취미는 독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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