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남극에서 느낀 ‘디자이너’ 세종

2016.02.02 10:28


[동아일보]
으, 춥다. 북극진동 때문이란다. 퇴근길 버스를 기다리며 꽁꽁 언 손이 스마트폰 한글 자판을 더듬는다. “형, 연락받았죠? 이달 중순에 행사한다는데, 가세요?” “응, 가야지.” 우리나라 남극조약 가입 30주년을 맞아, 그간 극지 활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초대되어 모인단다. 아마 이들 대부분은 잊지 못할 남극 추억 한두 개쯤은 갖고 있으리라.

세대를 초월한 30년어치 추억이 아로새겨진 세종기지. 그 역사의 현장 하나하나를 곁에서 조용히 지켜봐 온 이가 있으니, 바로 세종대왕, 아니 ‘세종 할아버지’이다. 나라마다 남극기지에는 역사적 위인을 이름으로 붙이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나라도 여러 과학 업적을 남긴 대왕 세종(남극세종기지), 동아시아 바다를 누비던 해상왕 장보고(남극장보고기지)가 그 주인공이다.

남극에 있는 동안, 기지의 수호신과도 같은 이 세종 할아버지를 뵐 기회가 많았다. 다름 아닌 생활관 휴게실에 걸려 있는 세종대왕 어진(御眞) 덕분이었는데, 아침 회의 때 보고, 밥 먹고 보고, TV 시청하며 보고, 동료 대원들과 대화 나누며 본다. 세종은 어느새 평범한 일상의 풍경이었다가도 이따금 생각거리를 툭 던져 주곤 했다.

한글. 세종 할아버지의 여러 생각거리 중에 단연 최고의 주제다. 킹조지 섬에서 함께 겨울을 나는 칠레나 아르헨티나 친구들에게 한글 읽고 쓰는 법을 소개해 주면 아주 흥미로워했다. 특히 국민(백성)을 위해 임금이 직접 디자인한 글자라고 하면 더욱 놀라워했다. 하지만 남극의 겨울이 끝날 때까지 그 친구들은 세종을 “킹 세용”이라 불렀다. Sejong에 들어있는 알파벳 j 때문이다.

8개 상주 기지가 모여 있는 남극 킹조지 섬은 작은 지구촌이다. 쓰는 말 또한 다양하다. 한국어, 중국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폴란드어, 포르투갈어 등인데, 정작 다 함께 쓰는 공용어는 어느 국가에도 속해 있지 않은 영어다. 이것도 세종기지에서 무척 재미있는 풍경이었다. 언제 어디고 각국 대원들이 만나면 떠듬떠듬 영어로 손발 섞어 가며 대화하는 풍경이 있었고, 거기에 술이 한잔 들어가면 서로 아무 말이나 해도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공용어는 영어였지만, 각국의 언어를 모두 소리 나는 그대로 옮겨 적을 수 있는 것은 한글이 유일했다. 문득 ‘우주의 창(窓)’ 남극에 외계인이 온다면, 처음 건넨 한마디를 채록하기에 가장 적합한 언어는 한글이 아닐까 생각했다. 사람의 발성 구조를 본떠 만든 글자이니 어쩌면 당연하다. 외국 기지에 방문할 때면, 간단한 인사말은 인터넷으로 검색해 한글로 옮겨 적어 가기도 했다. 깊은 새벽에 이따금 기상대원을 대신해 날씨 전문(電文)을 보낼 때면, ‘킹세종, 킹세종, 프레이. 프레이, 킹세종. 부에나스 노체스, 아미고…’라고 적힌 종이를 그대로 읽으면 되었다.

그런데 어두운 밤이 지배하는 시간이 오면, 남극의 언어는 또 다른 색깔이 된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는 배려의 언어가 필요하다. 작은 말 하나, 무심코 뱉은 말 하나가 상대에게 차가운 고드름이 되어 꽂힐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남극 최고의 언어는 고국의 가족과 나누는 대화이다. 펭귄마을에 앉아 남극으로 돌아오는 첫 펭귄을 발견했을 때의 반가움이랄까. 예전에 한 달 걸려 수기로 된 편지가 오가던 시절과, 비용이 너무 비싸 “여보세요? 여보세요? 잘 들려요?” 하고 나면 몇천 원이 훌쩍 넘어가던 위성전화 시절을 지나, 위성과 해저 케이블을 타고 오는 전기 신호는 바로 내 눈앞과 귓가에서 소중한 언어로 되살아난다.

유난히 움츠러드는 겨울, 입춘을 앞두고 2016년 대한민국에서 새삼 세종이 떠오른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와 같은 헤아림의 정신으로 600년 전 이 나라를 멋지게 디자인했던, 센스 있는 디자이너. 그 디자이너 덕분에 한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래서 세종 할아버지가 먼 후손들에게 보낸 ‘기프트 카드’를 다시 읽어 본다. 아름다운 글자이고, 아름다운 실천이다. ‘나라의 말씀이 중국과 달라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아니하니…사람마다 쉽게 익혀 나날이 씀에 있어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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