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과학사 연구자들 ‘17, 18세기의 재구성’

2007.10.26 09:05
때는 1757년 시월 어느 날, 조선·일본의 선각자들이 만났으니… 1772년 임진년 한성부에 자리한 조선 후기 과학자 정철조의 집. 몇 년 전 연행사(燕行使)로 청나라를 다녀온 홍대용이 친구 정철조와 박지원에게 중국에서 보고 온 서양 과학에 관해 열변을 토했다. 평소 서양 문물에 관심이 많아 가깝게 지내던 세 사람은 그날도 천문학을 주제로 새벽까지 토론을 이어갔다. 훗날 박지원은 자신의 일기에 새벽까지 이어진 홍대용과 정철조의 얘기를 남긴다. 당시 서양 과학이 가져다준 충격은 이처럼 조선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대 청나라와 일본의 지식인층에서도 적잖은 논란을 낳았다. 16∼18일 서울대 규장각에서 한중일 과학사 연구자들이 모인 가운데 17, 18세기 동아시아 국가의 서양 과학 수용 과정을 비교해 보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서양 과학 도입 시기는 비슷했지만… 17, 18세기는 청나라와 조선, 일본에 서양 문물이 본격적으로 전해진 시기. 서울대 임종태 교수는 “특히 18세기 후반은 서양 과학이 동아시아 국가에 깊이 인식되기 시작한 시기”라고 말한다.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을 비롯해 서양의 천문자료, 수학, 해부학이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들어왔다. 지동설을 근거로 하는 서양 천문학은 유교 세계에 적잖은 충격을 던졌다. 서양 천문학은 ‘다세계설’에 대한 논의를 낳으며 세계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요구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가장 보수적인 호서학파에서도 논의가 일었다. 이들은 서양에서 전해진 책을 근거로 세계를 육면체 구조로 파악했다. 따라서 한 세계에서 다른 면의 세계로 여행할 수도 있고, 각 면의 계절 변화와 밤낮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16세기 후반 스페인 선교사를 통해 서양 천문자료를 입수했다. 당시 전해진 천문정보 요약표는 달과 화성, 금성, 목성, 토성의 높이와 둘레, 지름은 물론 이들 행성과 지구 반지름의 비를 비교적 상세히 담고 있다. 일본 도쿄대 요시다 다다시 교수에 따르면 당시 일본 지식인층은 이를 통해 세계관을 태양계와 다른 은하계까지 확대했다. 충격만큼이나 오류도 많아 서양 과학은 도입 초기 전통 세계관과 합쳐지며 한계도 남겼다. 19세기 조선 실학자 최한기는 형이상학의 개념에서 벗어난 새로운 기(氣) 철학을 세우기 위해 서양 과학을 활용했다. 그는 서양 과학에서 말하는 압력, 대류, 온도에 따른 기체의 변화가 곧 기와 일맥상통한다고 봤다. 기체 성질을 이용해 기의 존재를 실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최한기는 ‘담천(談天)’ ‘공제격치(空際格致)’ ‘박물신편(博物新編)’ 등 한문으로 번역된 서양 과학서를 연구했다. 하지만 그는 산소나 수소 같은 좀 더 근본적인 개념을 알지 못했고 이를 실제 연구에 활용하지 못한 채 관념적 사고에만 그쳤다. 조선보다 한 세기 전에 같은 상황을 겪었던 일본은 같은 시기에 기체의 특성을 실제 실험으로 증명했다. 소남천문학사연구소 전용훈 박사는 “최한기는 과학적 태도로 독창적인 철학을 세우고 재해석했지만 결국 1850년대 이후 들어온 서양 과학에 맞서지 못했다”고 말했다. 중국과 일본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17, 18세기 도입된 서양 해부학은 사람의 영혼(인식)이 신체 어느 부위에 있느냐는 논란을 낳았다. 종교적 색채가 가미된 해부학을 건네받은 중국은 영혼(인식)이 가슴과 뇌에 있다고 절충한 반면, 그렇지 않은 일본의 일부 지식인은 뇌에만 영혼이 있다고 선택했다. 이는 일본이 독창적인 침술과 경락을 연구하게 된 계기로 작용했다. 조선, 서양 과학 도입에 소극적 태도 그렇다면 조선이 서양 과학 도입에 뒤졌던 이유는 뭘까. 한국외국어대 박성래 명예교수는 17∼19세기 청과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의 기록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박 교수는 “기록에 따르면 청에 파견된 연행사들은 비교적 적극적으로 정보를 수집한 반면,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들은 일본의 변화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18세기 말∼19세기 초 일본은 이미 근대화의 기초를 다지고 있었지만 통신사들은 변화의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 실제 일본은 1774년 독일의 해부학 책을 번역한 ‘해체신서’라는 최초의 근대적 해부학 책을 내놓는다. 이에 대해 임 교수는 “조선이 서양 과학을 늦게 도입해 근대화가 늦었다는 해석에는 무리가 있다”며 “그러나 17, 18세기 중국과 일본이 조선보다 더 풍부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以技制漢… “淸강희제, 과학으로 한족 통제” 청(淸)나라 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재위 1662∼1722·사진)는 일찌감치 ‘과학입국’을 표방한 최고 통치자다. 중국 역대 황제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 그는 집권 초기 어지러운 내분을 종식하고 나라를 정치적 경제적으로 안정시켰다. 중국 자연과학사연구소 한치 교수에 따르면 강희제는 통치 초기부터 서양 선교사들과 빈번하게 접촉했다. 최고 통치자가 서양과의 접촉에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조선이나 일본과는 달랐다. 평소 강희제는 음력에 있는 윤달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1688년 윤달을 두 번 넣는 문제를 놓고 청나라 조정은 내분에 휩싸였다. 강희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베이징(北京)에 머물던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서양 달력 계산법을 물었고, 이는 훗날 그가 서양 과학을 적극 수용하는 계기가 됐다. 강희제의 서양 과학 배우기는 단순한 호기심이나 민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한 교수는 “강희제는 서양 과학을 통해 당시 문화적 우월성을 내세우며 호시탐탐 청조를 노리는 한족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고 말한다. 이는 강희제가 1689년 한족 출신 관료인 학자 이광지(李光地)와 난징(南京)으로 순시를 나갔을 때 벌어진 일화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난징은 한족이 세운 명나라의 옛 수도. 난징에 도착한 강희제는 하늘에 떠 있는 별을 가리키며 이광지에게 어느 별인지 슬쩍 물었다. 황제의 물음에 이광지는 “노인성(老人星·카노푸스)이며 천하가 평화로울 때만 나타난다”고 자신 있게 설명했다. 이 말을 곰곰이 듣고 있던 황제는 “난징이 베이징보다 남쪽에 있어 (위도가 낮아) 항상 보이는 것 아니냐”고 웃으며 반문했다. 한 교수는 “이는 서양 과학을 통해 한족 최고 학자로 불리는 이광지의 전근대적 지식을 깨뜨려 만주족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강희제의 기지가 잘 발휘된 사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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