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패션날개 달다

2007.09.20 10:08
백화점에서 옷을 살 때 한두 가지만 보고 선택하는 일은 드물다. 여러 매장에 들러 몇 개를 입어 보고 비교해 고른다.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은 디자인. 옷의 디자인이 마음에 들고 자신에게 잘 어울려야 지갑을 여는 것이다. 전자 제품 매장에서는 달랐다. 어느 TV가 화질이 좋은지, 어느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CPU) 성능이 좋은지를 따졌다. 그러나 ‘어제’까지는 그런 전자제품이 잘 팔렸는지 모르지만 ‘오늘’은 옷처럼 감성을 만족시키는 제품들이 잘 팔린다. 전자 회사들이 이런 경향을 놓칠 리가 없다. 대형 가전, 인테리어 소품으로 ‘피카소에게 디자인을 맡겼다면 어떻게 만들었을까?’ LG전자의 데스크톱 PC ‘블랙 피카소’는 이런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구매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성능’이 절대적이던 데스크톱PC 시장에 ‘아트(art)’가 도입된 것은 그만큼 소비자가 디자인을 중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PC 선택의 기준은 오랫동안 중앙처리장치(CPU)의 연산속도와 하드디스크의 용량이었다. 그러다가 고성능이면서도 부피가 작고 세련된 소형 PC에 대한 소비자의 관심이 늘어나더니 예술품 분위기를 결합한 제품까지 등장했다. 세련된 소형 컴퓨터에 대한 수요는 ‘아트 PC’ 등장의 전조였던 셈이다. 블랙 피카소는 PC의 앞면에 슬라이딩 도어가 적용됐다. 또 조각품을 연상시키는 ‘3차원 입체 패턴’이 적용돼 예술적인 조형미가 더해졌다. 블랙 피카소는 검정과 하양, 빨강 3가지 색상으로 시판 중이다. 와인 잔을 형상화한 삼성전자의 ‘보르도 TV’는 이미 디자인으로 유명세를 탄 제품이다. 와인 잔의 부드러운 선과 고상한 분위기를 차용했다. ‘켜져 있기보다는 꺼져 있는 시간이 많은 TV. 그것이 작동하지 않을 때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디자이너의 질문에서 출발했다. 고급 가구점에 들르는 소비자들은 가구와 어울리는 TV를 구매한다는 것을 알아내고, 인테리어 소품 역할을 할 수 있는 TV를 구상한 것이 보르도 TV였다. 작년 4월에 시판된 보르도 TV는 1년여 만에 세계적으로 500만 대가 넘게 팔렸다. 삼성전자는 올해 감성적인 디자인을 더욱 극대화한 ‘2007년형 보르도 TV’를 내놓았다. 다양한 각도로 회전이 가능하고 전면부에 모니터를 제어하는 단추가 보이지 않도록 디자인한 ‘컬렉션 모니터’도 소비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제품이다. 독일과 일본의 디자인대회에서 각종 상을 수상했고 대한인간공학회로부터는 인간공학디자인상을 수상했다. 대우일렉트로닉스는 검은색과 원색으로 면을 분할하는 형식의 ‘아르페지오 스타일’ 냉장고와 세탁기, 에어컨, 김치냉장고, 전자레인지 등을 잇달아 선보이고 있다. 디자인의 통일성을 추구하는 노력이 엿보인다. 여기에다 올해는 전통 문양과 꽃잎 등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접목했다. 최근에 나온 전자레인지에는 고구려 연화(蓮花) 문양이 적용돼 눈길을 끌었다. 모바일 기기 ‘감성의 미학’ 추구 붙박이 가전제품뿐만 아니라 휴대형 전자기기에도 디자인 바람은 거세다. 몸에 지니고 다니는 제품이라 구매 단계에서 개인의 취향과 감성이 더욱 많이 반영되곤 한다. 삼성전자는 올해 6월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산업 디자이너 재스퍼 모리슨의 감각을 입힌 ‘재스퍼 모리슨 폰’(SGH-E590)을 선보였다. 그는 단순함을 강조하는 ‘미니멀리즘’의 대표주자로 장식적인 요소를 과감하게 생략하고 사용자의 편의를 극대화하는 ‘절제의 미학’을 추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휴대전화는 간결한 외관과 가볍고 아담한 바(Bar) 형태로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디자인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외형뿐만 아니라 사용법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형태로 디자인해 편의성을 높였다. 삼성전자는 2005년 미국 출신의 디자이너 ‘벳시 존슨’이 디자인한 ‘벳시 존슨 폰’을 비롯해 ‘안나수이 폰’ 등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제품을 잇달아 선보였다. 올해 7월 LG전자 ‘초콜릿 폰’은 일본 공영방송 NHK의 전파를 탔다. NHK가 세계 휴대전화 시장의 ‘디자인 전쟁’을 다루면서 디자인에 중점을 둔 대표적인 사례로 꼽은 것. 초콜릿 폰은 달콤한 초콜릿을 연상시키는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세계적으로 1400만 대 이상 팔렸다. 네모난 모습에 터치스크린을 적용한 비슷비슷한 디자인이 주를 이뤄 온 내비게이션 시장에도 디자인을 강화한 제품이 등장했다. 아이리버 내비게이션 ‘엔비’는 운전대와 비슷한 조그 다이얼을 갖춰 자동차 인테리어와 어울리도록 꾸며졌다. MP3플레이어는 아이팟의 인기가 대단하다. 아이팟을 만든 애플은 컴퓨터부터 아이팟, 아이폰(휴대전화)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느낌을 주는 디자인을 구현하는 회사로 유명하다. 아이리버가 선보인 미키마우스 형상을 닮은 MP3플레이어 ‘엠플레이어’도 독특한 디자인 때문에 인기를 얻었다. 전자업계 디자인 경영 붐 기술 격차가 줄어들면서 디자인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기업들은 소비자를 사로잡기 위해 전자제품에 ‘감성’을 입히기 위한 노력이 한창이다. 삼성전자는 2005년 4월 이탈리아 밀라노에 별도의 디자인연구소를 설립했다. 패션과 가구, 조명, 인테리어 산업이 발달한 현지에 연구소를 직접 세운 것이다. 이곳에서는 최신 디자인 트렌드는 물론이고 패션과 건축, 라이프 스타일 등에 관한 조사를 벌인다. 컬러나 신소재 등에 관한 분석도 이곳의 일이다. 이탈리아 디자인협회(ADI)와 함께 ‘삼성 영 디자인 어워드’ 공모전도 개최한다. 삼성전자는 이탈리아뿐 아니라 미국, 영국, 일본, 중국 등 5개 국가에 디자인연구소를 두고 있다. 국내에서는 2000년부터 삼성디자인학교(Art&Design Institute)를 운영 중이다. 또 2001년부터는 최고경영자 직속으로 디자인경영센터를 두고, 최고경영자가 직접 주재하는 디자인위원회를 통해 디자인 전략을 세우고 있다. LG전자 역시 디자인경영센터를 두고 소비자를 만족시키기 위한 제품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디자인경영센터 산하 코퍼리트디자인실에서는 소비자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디자인 만족감’을 찾아내 제품으로 구현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초콜릿 폰에 가장 어울리는 포장 방법, 프라다 폰에 가장 어울리는 사용자 인터페이스(UI) , 에어컨에 가장 잘 어울리는 표면 소재와 문양 등이 모두 이 디자인실의 연구과제다. 기술의 발달과 평준화로 디자인에 대한 수요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용의 편의성, 촉감, 청각 등에 대한 디자인까지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하는 시대다. LG전자 코퍼리트디자인실 김진 실장(상무)은 “앞으로는 소비자가 제품의 매력에 푹 빠져야 구매를 결정하게 될 것”이라며 “단순한 외형 디자인을 넘어 편의성이나 촉감 같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디자인까지 신경 써야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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