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인균의 우울증 이기기]가면을 쓴 우울증

2013.01.08 00:00

1993년에 개봉했던 ‘패왕별희’라는 영화가 있다. 초나라 항우와 우희의 비극적인 운명을 그린 중국의 유명한 경극을 소재로 한 것인데 화려한 분장을 하고 가면을 쓴 배우들이 특이한 발성으로 본인의 목소리를 숨기고 연기하는 경극이 이국적이고 매력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안타깝게도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장국영은 그로부터 10년 후인 2003년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진한 분장을 하고 가면을 쓴 우희가 그랬던 것처럼. 아직까지 원인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많은 질환들이 그렇듯 우울증에 대한 진단도 여러 증상들을 통계 내 이루어지게 된다. 우울증을 일으키는, 뇌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에 대한 연구들이 현재 많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에 대한 정보도 많이 축적되어 머지않은 미래에 좀 더 객관적인 진단 기준이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일단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우울증 진단 기준은 미국정신의학회가 내놓은 것이다. 언뜻 보면 매우 단순해 보인다. △2주 동안 지속되는 우울한 기분이나 의욕 상실 등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부분이고 △체중이 평소에 비해 너무 감소하거나 너무 늘 때 △불면이나 지나친 수면과 같이 수면 패턴이 불규칙해질 때 △만성 피로감을 호소하거나 과도한 죄책감에 시달릴 때 △한 가지 일에 집중하기 어렵거나, 자살 생각 같은 것이 반복해서 들 때 등이다. 그렇다면 우울증 진단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우울하다’는 감정 상태는 과연 무엇일까. 우리들은 평소에도 수시로 ‘아, 너무 우울해’ ‘우울해 죽겠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울한 감정에 매우 익숙해 있는 것이니 우울증의 증상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우울증은 많은 경우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그래서 알아채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평범한 아이가 어느 날 우울한 감정 상태에 빠지게 될 경우 “엄마, 제가 우울해요”라고 말하기보다 수업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산만해지고, 성적이 떨어지고, 하루 종일 잠만 자려 하고, 엄마에게 갑자기 화를 낼 수 있다. 한창 사춘기인 아이가 우울한 감정을 겪게 된다면 갑자기 욕을 심하게 하고, 가끔은 물건을 던질 정도로 폭력적이 되며, 게임에 빠질 수도 있다. 학교는 가까스로 다녀오지만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방에서 하루 종일 누워 있으려고만 할지 모른다. 노인이 되어 처음으로 우울한 감정을 경험하게 되면 말수가 갑자기 적어지고, 평소에 잘하던 계산도 못하고, 멍한 모습을 보여 혹시 치매에 걸리지 않았나 하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우울증은 그 사람의 과거 경험이나 평소 모습 등 생애의 중요한 부분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부모와의 오랜 갈등으로 힘들어했던 사람들은 부모에 대해 지나친 죄책감을 갖거나 반대로 자식을 향해 과도하게 짜증을 부리는 형태로 우울증이 나타난다. 어려서 몸이 약해 잔병치레를 했던 사람은 특별한 병이 없는데도 여기저기 몸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지나친 건강 염려증을 보이기도 한다. 늘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꾹꾹 눌러 두었던 사람에게 우울증은 가슴에 뭉친 화처럼 묵직한 답답함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알코올 문제가 있었던 사람이라면 우울할 때 술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우울증’에서 보이는 우울한 감정 상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익숙하지도 않고 또 잘 알아챌 수 없는 부분일 수 있다. 우울증은 여러 분장을 하고, 때로는 가면으로 진짜 모습을 가리고, 매우 생경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따라서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주위 사람도 우울증이라고 느끼지 못하기 십상이다. 우울증을 겪는 많은 사람들이 전문적인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태라고 인지하지 못하고 적절한 치료시기를 놓쳐 어떤 때는 되돌릴 수 있는 순간을 놓치고 안타까운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처럼 우울증은 ‘상처’가 드러나 보이는 것도 아니고 의료영상으로 찍었을 때 보이는 것도 아니며 기침이나 구토와 같은 눈에 보이는 증상이 없기 때문에 어렵고 심각한 질병이다.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고 아이들도 큰 말썽을 부리지 않는 한 가장이 회사의 대형 프로젝트를 앞두고 불안 초조에 시달리며 자신감을 잃고 결과에 대해 과도한 걱정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 대개는 우울증 가능성을 생각하고 전문가를 찾기보다 오히려 직장에서 냉혹한 승부사 모습을 연출하다가 밤에는 술로 불안과 불면을 달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는 지속되는 스트레스 상황 속에서 우울증이 ‘슬며시 보이지 않게’ 자리를 잡는 상태이다. 항상 피곤하고 여기저기 이유 없이 몸이 아픈 가정주부는 가정의학과나 내과 전문의를 반복적으로 찾으면서 눈에 보이는 원인을 찾아달라고 요구한다. 처음엔 아내를 도우려고 노력했던 남편도 아내가 병이 없는데도 통증이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중에는 짜증으로 반응한다. 우리나라는 특히 정신장애 환자들이 병원을 찾지 않는 비율이 높다. 여러 선진 국가 중 특히 높은 자살률은 이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우리 사회는 우울증을 ‘직시하려는’ 용기가 부족한 것 같다. 조금만 빨리 주의를 기울여 치료를 통해 아까운 생명을 지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 비록 가면을 쓰고 연기하지만 가면을 쓴 배우가 우리가 잘 아는 이라면 그 배우가 오늘은 피곤한지, 즐거운지, 평소와 같은지, 다른지 미묘한 차이를 알아차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내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 누군가가 평소와 다른 낯선 모습을 하고 있고 그 사람의 내면에서 뭔지 모를 어려움이 느껴진다면 우리가 대신 알아채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우울증의 가면을 벗고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살펴야 한다. 류인균 이화여대 약대 석좌교수·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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