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구 피임약은 누가 만들었나…페미니스트? 화학자? 자본가?

2012.11.18 00:00
12일 오전 8시 30분. 필자는 택시에서 급하게 문서를 전송해야했다. 노트북PC를 켰고, 스마트폰에 연결했다. 휴대폰을 모뎀으로 쓰는 ‘테더링(tethering)’을 이용해 접속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스마트폰 설정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개인용 핫스팟’이라는 메뉴가 안보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 일주일전 스마트폰의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한 적이 있다. 그 이후로 이 메뉴가 없어진 것으로 생각됐다. 결국 스마트폰을 통한 접속에 실패했다. 신호대기로 정차했을 때 잡힌 무선랜 신로를 통해 e메일을 보내기는 했다. 그러나 내 스마트 폰에서 사라진 ‘개인용 핫스팟’ 메뉴를 찾아야 했기에, 정보기기를 알 듯한 사람들에게 해결 방안을 물었다. ●‘우회’를 통해 드러난 테더링 접속의 경로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A에게 전후사정을 설명하니 “스마트폰을 껐다가 켜봐”라고 말한다. 해봤다. 그렇지만 여전히 ‘개인용 핫스폿’ 메뉴는 나타나지 않았다. 개발자인 B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네트워크만 재설정을 해보라고 조언을 들었다. 해봤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B는 동료 개발자 C에게 물었다. C가 내 스마트폰을 가져가더니 ‘설정’ 항목에서 ‘셀룰러’를 찾았고, 그 안에 ‘개인용 핫스팟’ 설정을 찾아 조작했다. 그러고 다시 설정 메뉴로 가보니 예전처럼 ‘개인용 핫스팟’ 항목이 보였다. 평소에는 당연히 접속되어 문제가 없었던 ‘테더링’을 몇 단계 거치는 우회를 통해서 하게 됐다. 이로써 평소에 의존했던 테더링이라는 기술을 사용하는데 여러 가지 복잡한 과정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체험했다. ●과학인문학 vs 개코원숭이의 인문학 행위자 연결망 이론(ANT: Actor Network Theory)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학자 브뤼노 라투르가 독일의 한 대학생에게 편지를 통해 강의한 내용을 엮은 책인 “과학인문학 편지”가 이달 5일 국내에 번역 출판됐다. ANT는 라투르가 프랑스의 미셸 칼롱, 영국의 존 로 등의 학자들과 1980년대 개발했다. 이 이론은 과학과 기술을 이해하기 위해서 과학사회학 분야에서 제안된 이론 이지만 최근에는 정치,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도 응용되고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행위자는 다른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으며, 심지어 사물, 자연 등과도 협력 또는 갈등을 일으키는 등 복잡한 관계를 갖는다. 따라서 어떤 현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회 속에서의 관계 뿐 아니라, 세균, 건물, 기계와 같은 기술이나 과학의 요소들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라투르는 과학기술을 배제한 그동안의 인문학은 ‘개코원숭이의 인문학’이라고 비판한다. 개코원숭이는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하지만 인간과 달리 기술의 중개(번역)를 거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거의 모든 행위는 과학기술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 몇몇 기초적인 도구를 제외하고는 과학과 기술을 통해 가공된 사물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라투르는 “어떤 특수한 지식, 다소간 오래된 기술, 때로는 좀 더 고도의 과학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거의 모든 행위에 깔려 있는 과학과 기술의 요소를 배제한 채 진행된 그동안의 인문학은 많은 것을 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렇지만 평소에 과학기술은 오히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라루르는 “우리는 기술에 완전히 의존하는 한편, 그러한 기술위에 떠도는 것 같다”면서 “그 이유는 바로 기술이 너무 효과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너무나 익숙해서 복잡한 연관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결국 과학과 기술을 ‘추상적’ 또는 ‘관념적’으로 보고, 과학기술을 중립적인 속성인 것으로 방치해 둔다. 다만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상황이 다르다. 라투르는 무선랜이 고장이 나서 학교의 업무지원센터를 찾아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다시 전산망에 접속한 사례를 든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 여러 차례 우회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과정들이 노출된다. 필자가 스마트폰의 테더링 방식을 찾지 못한 채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고 해결방안을 알아낸 것과 같다. 라투르는 같은 방식으로 경구피임약이 출현한 과정을 설명한다. 경구 피임약은 페미니스트 운동가, 스테로이드 합성 물질을 발견했던 화학자, 자본 등이 서로의 이해관계를 반영해 가면서 만들어낸 합작품이라는 것이다. 사람, 물질, 돈, 사회 등이 다양한 방식으로 엮여 가면서 창출해낸 것을 통합적으로 봐야하며, 이 과정에서 사람이 아닌 사물, 과학기술 역시 정치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과학인문학 방법 연습하기 ANT는 논문, 번역서 등을 통해 소개된지 오래됐다. 그러나 이론 자체가 너무 어려워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실제 사례에 적용된 논문은 몇 편에 불과하며, 그 역시 명쾌하게 읽혀지지 않는다. 라투르 자신도 ANT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는지, “과학인문학 편지”라는 책을 통해서 일종의 학습법을 제시했다. 신문에 난 사건을 스크랩하고, 우회 경로 도식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친절하게 소개했다. 마치 고등학교 때 ‘수학의 정석’이라는 교재를 산 뒤에, 저자가 직접 문제를 풀은 ‘수학의 정석 해설’을 구한 느낌이라고 할까. 그러나 해제집 역시 필자에게는 어려웠다. 한번 읽어서 제대로 내용을 이해한 것 같지 않다. 라투르의 접근은 이미 몸에 익어 버린 방식과 너무 달라서인지, 적응을 위해서는 몇 차례 곱씹어 봐야하겠다.

메일로 더 많은 기사를 받아보세요!

이 기사 어떠셨어요?

댓글 0

작성하기

    의견쓰기 폼
    0/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