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책의 향기가 아닌 꽃향기에 취했다!

2012.07.23 00:00
‘도서관에 무슨 예술 작품이 이렇게 많아? 그리고 정원은 공원 수준이네!’ 얼마 전 주말에 패서디나 남쪽에 있는 ‘헌팅턴 도서관’을 방문했을 때 받은 첫 느낌이다. 헌팅턴 도서관의 정식 명칭은 ‘헌팅턴 도서관, 미술관(Art Collections) 및 식물원’이다. 도서관, 미술관, 식물원이 삼위일체가 된 이곳은 1919년 미국의 철도 사업가 헨리 헌팅턴이 사유지에 개인 소장의 도서와 미술 작품을 공개하기 위해 설립한 시설이다. 도서관에는 희귀 도서가 가득하고, 갤러리에는 18세기 유럽의 걸작 예술품이 전시돼 있으며, 식물원은 헌팅턴 생전에 대부분 조성돼 100년이라는 긴 역사를 자랑한다. 연간 50만 명 이상이 찾는다는 관광 명소인 이 곳을 찾는 이들은 어디선가 본 듯하다는 '데자뷔' 현상을 느끼게 된다. 사실 이곳은 영화 ‘미녀삼총사’ ‘미드웨이’ ‘아메리칸 웨딩’ ‘은밀한 유혹’ 등의 배경이 되기도 했단다. 우아한 이오니아 기둥의 궁정식 도서관에는 희귀 장서, 유명 저자의 필사본, 사진 등 600만여 작품이 차지하고 있다. 이 중 1410년 경 영국 계관시인이자 영문학의 아버지인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 1455년 피지에 인쇄된 구텐베르크 성경,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초판,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친필 편지, 찰스 디킨스, 마크 트웨인 같은 유명 작가의 원고 등은 보는 이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만든다. 또 19세기 초 미국의 화가이자 조류 연구가인 존 오듀본이 펴낸 ‘미국의 새들(Birds of America)’란 책도 인상적이다. 도화지 크기의 커다란 책에는 그가 1000여 마리의 새를 직접 관찰해 있는 그대로 그린 사실화(寫實畵) 400매 이상이 담겨 있다. 도서관의 딥너 홀에서는 ‘아름다운 과학: 세상을 바꾼 아이디어’란 주제로 아리스토렐스에서 아인슈타인까지 과학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전시물은 천문학, 자연사(natural history), 의학, 광학 분야로 나눠져 있는데, 이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드 아니말리부스'(1275년경 시어도어 가자의 번역본), 갈릴레이의 '시데레우스 눈치우스'(1610년), 다윈의 종의 기원(1859년), 아인슈타인이 카네기천문대 설립자이자 초대 소장인 조지 헤일에게 보낸 편지(1913년) 등이 방문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예술 작품은 3개의 건물에 나눠져 진열돼 있다. ‘헌팅턴 아트 갤러리’란 건물에 유럽의 예술품이, ‘스코트 갤러리’란 건물에는 미국의 예술품이 방문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나머지 한 건물은 전시품이 수시로 달라진다. 원래 헌팅턴 가족의 저택이었던 아트 갤러리는 1911년 완공됐다. 헌팅턴 아트 갤러리는 마치 18세기 유럽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1200여 작품이 전시돼 있는데, 다채로운 그림은 황금빛 액자에 담겨 벽에 걸려 있고, 사실감 넘치는 조각상은 목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사방 벽에 인물화 작품이 둘러싸고 있는 한 전시실에는 흥미롭게도 청춘 남녀의 그림이 맞은편 벽에 각각 걸려 있어 서로 마주보고 있다. 부끄러운 듯 두 뺨에 홍조를 띤 그림 스타일이 비슷해 보여 혹시 같은 작가가 그린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지만, 사실 남자는 1770년경 토머스 게인즈버러가 그린 ‘파란 옷을 입은 소년(Blue Boy)’이고, 여자는 1794년 토머스 로렌스가 그린 ‘핑키(Pinkie)’다. 두 작품의 화가가 모두 영국 출신이라 점을 빼면, 많이 다르다. 두 그림이 그려진 시기가 25년쯤 차이 나고, 그림 속에 등장하는 옷 스타일도 150년 세월이 가로막고 있다. 조각상 중에서는 왼손에 활을, 오른쪽에 화살을 든 미끈한 여신의 청동상이 눈에 띈다. 프랑스의 조각가 장 우동(Jean-Antoine Houdon)이 빚은 ‘여자 사냥꾼 다이아나(Diana the Huntress)’다. 야외에는 각각 테마를 가진 10여 개의 정원이 이곳저곳에 꾸며져 있다. 사막 정원, 장미 정원, 허브 정원, 야자수 정원, 셰익스피어 정원, 어린이 정원, 아열대 정원, 정글 정원, 중국 정원, 일본 정원, 호주 정원, 백합 연못…. 이 중에서 5000종 이상의 선인장류가 자라고 있는 사막 정원, 2000년이 넘는 장미의 역사를 보여주는 장미 정원, 중국 타이후 호수에서 가져온 암석으로 꾸며 놓은 중국 정원 ‘류방원(流芳園, 흐르는 향기의 정원)’, 아기자기하게 전통 가옥과 다리로 이뤄져 있는 일본 정원이 돋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움을 담은 한국 정원이 없다는 게 아쉬웠다. 또 헌팅턴 식물원에는 학생이나 가족이 직접 해 볼 수 있는 시설이 여럿 갖춰져 있다. 어느 꽃의 꿀이 얼마나 달콤한지 장비를 이용해 당도를 측정하고, 팔랑개비처럼 생긴 씨앗이 어떻게 바람에 실려 날아가는지 바람을 만들어 실험하며, 고사리 같은 양치류에서 포자를 만드는 세포가 어떻게 생겼는지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식이다. 식물원에서는 구하기 힘든 희귀종을 채집해 연구하기도 한다. 어린이 정원에서도 과학을 체험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커다란 말굽자석에 철가루를 붙여 다리 모양을 만들 수 있고, 어린이들이 통과할 수 있는 터널(일명 ‘프리즘 터널’) 사이에서 바닥에 비친 무지개를 볼 수 있으며, 자그만 돌무더기를 집어넣으면 종소리가 나는 시설도 있다. 헌팅턴 도서관에 책을 보려고 왔다가 유럽 미술품에 반하고 각종 체험을 하며 장미향에 깊이 취해버렸다. 100년의 역사가 담긴 이 곳에서는 책, 자연, 예술, 과학이 결코 멀지 않음을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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