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없는 세상을 위하여

2008.07.16 18:47
<여기까지 오기까지> 5분 만에 인생 진로 결정 “어려서부터 과학자가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초등학생 때는 집안에 전파사를 차린 것 같았어요.” 통증발현연구단을 이끄는 오우택 단장(서울대 약학과 교수)은 손재주가 뛰어나 이웃집 라디오가 고장이 나면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집안의 가전제품을 닥치는 대로 분해하고 조립하는 게 취미여서 나중에는 손수 라디오를 만들어 팔기까지 했다. 특히 물리와 수학을 좋아했는데 화학과 생물은 몹시 싫어했다. 이런 그가 약학과에 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1974년 서울대 자연계열로 입학한 오 단장은 “고등학생 때까지 기계를 많이 만져 딴에는 조금 안다고 생각해 공대에 가기 싫었다”며 “함께 하숙하는 친구의 권유로 단 5분 만에 인생의 진로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새내기 때는 철학자 니체나 키에르 케고르의 책을 탐독하며 실존주의에 빠지기도 했는데 정작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심각한 고민이 없었던 것 같아요.(웃음) 하지만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인 연구의 참맛을 알았죠.” 1983년 미국 오클라호마대에서 박사과정을 거치면서 오 단장은 본격적인 통증연구를 시작했다. 당시 뇌과학이나 신경과학을 전공하는 곳은 미국에서 5곳이 안 될 만큼 미개척 영역이었다. 한 마디로 오 단장은 운이 좋았다. 남들이 개척하지 못한 분야를 전공한 그는 미국 텍사스주립대 의대에서 박사후연구원을 마치자 곧바로 서울대 약학과 교수로 채용됐다. <어려움을 넘어> “과학자로서 비애를 느꼈다” 1988년 12월 교수로 부임했지만 그에게 주어진 것은 20평 남짓한 텅 빈 연구실과 신진교수 연구비로 나온 200만원이 전부였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데, 연구실에 들어가니까 달랑 빗자루 2개와 칠판, 그리고 분필 2개가 있었어요. 그냥 ‘청소나 해라’ 이거지.”(웃음) 신경세포를 연구하려면 동물의 뇌를 해부해서 세포 사이를 1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 간격으로 조절해가며 전극을 꽂아야 했다. 하지만 적은 연구비로 실험장비를 사기에는 부담이 커서 그는 모터와 반도체 칩, 회로기판 등을 구입해 실험장비를 직접 조립했다. 처음에는 진통제를 개발하기 위해 통증을 관할하는 고양이의 신경세포에 몰핀을 주입했다. 이론적으로 마약성분의 몰핀이 통증을 줄여줘야 했다. 그러나 실험은 뜻대로 되지 않고 무수한 실패가 뒤따랐다. 오 단장은 “그땐 정말 과학자로서 비애를 많이 느꼈다”고 회상했다. 1994년 오 단장은 미국 시카고대 의대에 교환교수 자격으로 방문했다. 감각신경 말단의 이온채널을 연구할 수 있는 ‘패치클램프’(patch clamp)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다. 패치클램프는 가늘고 긴 전극을 두 개 뽑아 세포에 대고 유리로 연결된 호스를 입으로 빨면 전극 사이에 세포막이 고정되는 장치다. 감각을 느끼는 신경세포가 신호를 감지하는 것은 닫혀있던 세포막이 열리면서 바깥 양이온이 세포 안으로 들어가면서 이온농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포막이 열리고 닫히는 통로가 ‘이온채널’이다. 그곳에서 오 단장은 캡사이신 채널을 연구했다. 고추의 매운 맛을 느끼게 하는 캡사이신이란 성분이 신경세포를 자극해 통증을 유발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캡사이신이 어떻게 통증을 유발하는 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그는 통증을 느끼는 신경세포에 캡사이신이 통과하는 이온채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예상대로 통증을 느끼는 신경세포에 캡사이신을 넣자 세포막이 열리고 이온차가 발생했다. 반대로 이온채널을 막아주는 캡사제핀을 넣자 신경세포가 닫혔다. 세계 최초로 신경세포에서 캡사이신 채널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나의 성공담> 통증 유발 메커니즘 완벽히 밝혀 한국에 돌아온 오 단장은 캡사이신 채널을 증명하기 위한 몇 가지 실험을 더해 1996년 세계적인 신경과학 전문지 ‘저널 오브 뉴로사이언스’ 4월 1일자에 논문을 발표했다. 이 결과 덕분에 1997년 그는 창의적연구진흥사업단에 선정됐다. 오 단장은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통증을 느끼는 캡사이신 채널이 우리 몸에 있는데, 이 채널을 여는 열쇠(고추의 캡사이신)는 몸 밖에 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나요?” 연구 끝에 그는 ‘12-HPETE’라는 불포화지방산을 찾았다. 얼핏 분자식만 보면 캡사이신과 12-HPETE는 전혀 다른 물질 같았지만 3차원 구조를 살펴보니 매우 비슷한 물질로 밝혀졌다. 캡사이신 같은 열쇠가 신경세포에 닿으면 세포막 표면에서 이온채널이 열리고 밖에 있던 양이온이 세포 안으로 들어가 안팎의 이온차가 발생해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 결과는 2000년 미국 과학기술원회보(PNAS) 7월 23일자에 실렸다. 나아가 오 단장은 염증을 유발하는 브래드키닌이 세포막을 통과해 아라키돈산을 만들면 아라키돈산이 12-HPETE를 합성하는 메커니즘을 알아냈다. 브래디키닌이 12-HPETE를 배후에서 조정하고 있었던 셈이다. 오 단장이 캡사이신 채널을 통해 통증이 발생하는 메커니즘을 밝혀낸 성과는 새로운 진통제 개발로 이어졌다. 그는 서울대 약대 연구팀과 태평양연구소 신약팀, 그리고 숙명여대 약대 연구팀과 공동으로 2002년 차세대 통증차단물질인 ‘PAC20030'을 개발했다. 이 물질은 12-HPETE와 구조가 비슷해 세포막에 달라붙지만 이온채널은 열리지 못하게 한다. 최근에는 이온채널 연구에 유전자 염기서열을 알아내는 분자생물학적 분석을 더하고 있다. 그는 “통증 관련이 아닌 새로운 이온 채널을 몇 개 더 발견해 유전자 염기서열을 분석하고 있다”며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통증 연구의 미래상> 전 세계 제약회사는 진통제 개발 중 통증 연구는 해가 바뀔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불과 7~8년 전에는 몇 개의 제약회사만 통증 연구를 시도했지만 지금은 거의 모든 제약회사가 진통제 개발에 진력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4개의 제약회사가 캡사이신 채널을 이용한 진통제를 연구 중이다. 오 단장은 “통증을 완벽히 없애는 치료도 중요하지만 통증을 줄이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람이 오래 살수록 다양한 질병에 시달리고, 각각의 질병들은 여러 형태의 통증을 유발하기 마련이다. 쉽게 생각해도 허리통증, 류마티스 관절염, 두통, 치통, 수술통까지 통증은 그 형태와 종류도 다양하다. 오 단장은 “전쟁이 일어나면 마약성 진통제와 항생제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며 “두 가지가 있으면 수많은 부상병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총탄을 맞으면 팔이 끊어져 죽는 게 아니라 극심한 통증으로 죽을 수 있어요. 통증이라고 하면 상처만 생각하지만 호흡이 가빠지거나 혈압이 불안해도 쇼크사할 수 있습니다. 피는 금방 지혈합니다. 그때 마약성 진통제를 넣으면 잠을 자면서 안정을 취해 살아날 수 있지요.” 오 단장은 “앞으로 20년 뒤에는 통증채널을 억제하는 알약 몇 개 먹고 수술 받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환자의 의식도 멀쩡히 깨어나 있으니 수술하면서 TV나 신문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날이 오면 누구나 ‘고통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 않을까. 통증은 [ ](이)다 오 단장에게 통증은 ‘괴물’이다. 통증은 원인이나 형태가 다양해 그 실체를 알기 어렵다. 누구에게나 통증과의 첫 만남은 비호감이다. 녀석을 만나면 몸이 아프고 정복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괴물인 것이다. 몸이 심하게 아프면 잠을 잘 수 없다. 그러나 통증이 조금만 줄어도 잠을 청할 수 있다. 병을 완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통증을 줄이는 것도 중요하다는 얘기다. 오 교수에 따르면 60~70%의 말기 암환자가 엄청난 고통에 시달린다. “한 환자분 말씀이 암 환자의 고통은 톱 100개와 송곳 100개, 망치 100개로 쑤시고 찢고 내리치는 것 같데요. 그들을 도울 방법은 마약성 진통제밖에 없는데, 그것조차 소용없는 환자가 많아요.” 고통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 그들의 관심은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고통 없이 죽는 것에 쏠린다. 어차피 괴물을 정복할 수 없다면 괴물과의 만남을 피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오 교수는 “다른 사람이 나를 돈키호테라 불러도 통증을 없애는 진통제 개발은 내게 주어진 소명”이라며 “통증이란 괴물을 반드시 정복하겠다”고 다짐했다. <출처:창의적연구진흥사업단 창의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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