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자물리학자 4명의 ‘나는 힉스다’

2012.05.06 00:00
“1등을 뽑겠습니다. 299번, 299번! 안 계세요?” 한국물리학회 봄 학술논문발표회가 열린 대전컨벤션센터의 한 대형 강의실. 물리학자 4명이 겨루는 ‘나는 힉스다’ 강연이 끝난 뒤 채점을 하는 동안 청중을 대상으로 경품 추첨이 한창이다. 299번 번호표를 가진 사람은 나갔는지 대답이 없다. 최근 물리학계의 최대 화제는 힉스입자의 발견여부에 쏠려있다. 4월 25~27일까지 열린 이번 논문발표회에서도 미국 스탠퍼드선형가속기연구소(SLAC) 마이클 페스킨 교수가 ‘힉스보손: 기대가 실현되다’란 제목으로 26일 강연을 했고 전날인 25일에는 ‘나는 힉스다’란 이벤트까지 벌어졌다. ‘7분 안에 중학교 3학년도 이해할 수 있게 힉스를 설명할 것’이라는 미션을 받은 입자물리학자 네 사람은 물리학회 최초로 시도되는 파격적인 형식에 학술발표에 연사로 나설 때보다도 더 긴장한 모습이다. 299라는 추첨번호가 알려주듯 300명이 훌쩍 넘는 청중들(주로 대학원생들)은 평소 보지 못했던 발표자들의 퍼포먼스에 열광했다. ●청바지에 선글라스 낀 '근엄한' 교수님 첫 연사로 나선 경희대 남순건 교수는 ‘정석대로’ 힉스입자를 설명해나갔는데 7분이 후딱 지나가, 서둘러 발표를 마쳤다. ‘나도 가수다’처럼 가장 먼저 발표하는 사람이 불리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 올라온 서울대 김형도 교수는 “남 교수님 발표를 보니 부담감이 확 줄었다”며 좌중의 폭소를 자아낸 뒤 차분하게 발표에 들어갔다. “‘신의 입자’ 힉스가 모든 입자에 질량을 부여하는 건 아니다”라는 설명이 인상에 남았다. 다음 연사는 고려대 최준곤 교수. 터미네이터를 컨셉으로 한 듯 청바지에 선글라스를 끼고 나온 최 교수는 화이트보드에 자석을 던지는 퍼포먼스를 보여 가며 힉스를 설명했다. 보드에 착 달라붙어 잘 안 떨어지는 ‘자석’은 힉스장에 꽉 잡힌 ‘질량이 큰 입자’와 같다는 것. 한시도 쉬지 않고 무대를 왔다 갔다 하던 최 교수는 정해진 시간을 넘겨가며 설명에 열을 올리더니 막판에 “자기장으로 힉스장을 비유한 건 비유일 뿐 곧이곧대로 들으면 안 된다”고 마무리해 청중들을 박장대소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연세대 권영준 교수는 잔잔한 호숫가에 파문이 이는 것을 힉스장에서 힉스입자가 나타나는 것으로 비유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권 교수는 최근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검출한 신호가 힉스입자가 아닐 확률이 500분의 1이라는 의미를 설명한 뒤 아닐 확률이 700분의 1 미만일 때는 ‘새로운 현상의 증거’로, 350만 분의 1 미만일 때는 ‘새로운 현상의 관측 즉 발견’이라고 덧붙여 현재 단계를 명쾌히 보여줬다. 투표결과 1위는 권영준 교수가 차지했다. 뒤로 갈수록 유리한 ‘나는 가수다’의 결과가 재현됐다. ●한국 논문 발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이번 행사 3일 동안 국내외 저명한 물리학자들의 강연이 이어졌는데 특히 미국 프린스턴대 폴 스타인하르트 교수는 수, 목 이틀 사이에 전혀 다른 분야의 강의를 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수요일에는 지난해 노벨화학상을 받은 분야인 준결정(quasicrystals)에 대한 강의를 했는데 천연 준결정을 찾는 여정을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설명해 많은 관심을 받았다. ‘Rethinking Cosmology(우주론 재고찰)’이란 제목의 목요일 강의는 상당히 쇼킹했다. 오늘날 사람들이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빅뱅 인플레이션 이론이 과연 그런가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청중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이어서 등단한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페렌크 크라우츠 교수는 ‘아토초 물리: 첫 10년’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100경분의 1초의 세계인 아토초(attosecond, 아토는 10-18을 뜻하는 접두어) 물리학을 화려한 그래픽을 곁들여 설명했다. 짧은 펄스를 생성하는 레이저가 개발되면서 가능해진 아토초 물리학은 원자와 분자를 이루는 전자의 움직임까지 볼 수 있어 물리학과 화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이밖에도 천체물리학분과 등 11개 분과별로 발표가 진행됐다. 한편 이번 발표회는 한국물리학회 창립 60주년 기념식도 겸한 뜻 깊은 자리였다. 그래서 수요일에는 ‘물리학의 현 상태와 미래 전망에 관한 특별 포럼’이 열리기도 했다. 국내외 7개 물리학회 회장이 각자의 학회를 설명하고 앞으로 나갈 길을 모색하는 이 자리에서 한국물리학회 신성철 회장(대구경북과학기술원 총장)은 1952년 전쟁 중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물리학자 34명이 모여 만든 한국물리학회가 올해로 환갑을 맞아 회원수 14000명의 거대 학회로 성장한 과정을 설명했다. 신 회장이 보여준 도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기관이 최고권위의 물리학회지인 ‘피지컬리뷰레터스(PRL)’에 실은 논문수가 1960년대는 한 편도 없었고 1970년대에는 한편이었던 게 2000년대에는 1387편에 이르렀다. 신 회장은 강의가 끝나고 만난 자리에서 “학문이 꽃을 피우려면 3세대가 필요한데 지난 60년은 뿌리를 내리는 1세대, 줄기가 자라는 2세대였다”며 “이제 3세대가 시작되는 시점이므로 머지않아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발표회에는 ‘나는 힉스다’를 비롯해 부산대 이창환 교수(블랙홀)와 경북대 김동희 교수(힉스입자)의 대중강연 등 과학 대중화를 위한 노력이 두드러졌다. 이에 대해 신 회장은 “기초과학 연구도 사회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이뤄지기가 불가능하다”며 “이제는 삶의 질이 높아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 걸맞는 지식의 질을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 세금으로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대중에게 자신들이 한 일이 인류의 지적 발전에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도 과학자의 의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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