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앞의 파스퇴르 vs. 실험실의 파스퇴르

2011.02.24 00:00
구제역으로 온 나라가 난리다. 자식처럼 키운 가축들이 살처분되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는 축산 농가의 안타까운 사정에 살처분하는 방역 공무원들이 받는 엄청난 스트레스, 거기에 백신의 부작용까지 날마다 가슴 아픈 소식들이 전해든다. 구제역처럼 심각한 전염병으로 고통 받는 일이 어제 오늘만의 일이겠는가. 19세기 말, 프랑스 축산 농가는 가축 전염병인 탄저병으로 해마다 2000~3000만 프랑의 경제적 손실을 겪어야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서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의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그 유명한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다. ●탄저병과의 한판승 1881년 6월 2일, 프랑스 푸이 르 포르의 한 농장에 2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파스퇴르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세기적인 실험 결과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모인 정부 관료, 수의사, 지방 정치인, 농학자, 신문기자들이었다. 이 실험은 한 달도 더 전의 제안이 발단이었다. 백신에 회의적이었던 수의사 히폴리트 로시뇰은 파스퇴르에게 과학자로서의 명예를 건 테스트를 제안했다. 파스퇴르가 줄곧 주장하고 선전한 백신의 효능을 대규모 공개 실험으로 검증해 보자는 것이었다. 만약 파스퇴르가 이에 응한다면 로시뇰은 푸이 르 포르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 있는 수십 마리의 양을 기꺼이 제공하겠다고 했다. 파스퇴르는 이 실험에 흔쾌히 응했다. 로시뇰과 실험의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 합의한 후 파스퇴르와 그의 조수들이 실험에 착수했다. 로시뇰의 농장에서 60마리의 양을 골파스퇴르라 그 중 10마리는 비교를 위해 남겨두고, 남은 50마리 중 25마리에는 5월 5일과 5월 17일 두 차례에 걸쳐 백신 예방접종을 하고 나머지 25마리에는 백신 예방 접종을 하지 않았다. 5월 31일, 예방접종을 한 양과 하지 않은 양 50마리에게 독성이 강한 탄저균을 주입했다. 그로부터 이틀 후인 6월 2일, 최종적으로 백신의 효과를 확인했다. 백신을 접종한 양들은 모두 무사히 생존해 있을까? 백신을 접종하지 않은 양들은 탄저병의 희생양이 되었을까? 결과는 파스퇴르의 압승이었다. 백신을 접종받지 못한 25마리 중 21마리는 죽고 남은 양들도 곧 죽을 듯이 비실비실한 상태인 반면, 백신을 접종받은 25마리의 양은, 한 마리 암양의 상태가 안 좋기는 했어도 모두 살아 있었다. 로시뇰을 비롯하여 백신의 효능에 회의적이었던 수의사들은 이 공개 실험으로 단번에 파스퇴르의 열렬한 지지자로 돌아섰다.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인공 백신의 효과를 확인하는 세계 최초의 공개실험이 성공으로 끝난 것이다. 공개적인 망신을 두려워한 파스퇴르가 당일 아침 성공을 알리는 전보를 받기 직전까지만 해도 조수인 에밀 루를 대신 보낼 생각을 했다는 이야기는 이 대단한 성공을 심심치 않게 만들어주는 양념처럼 얹어졌다. ●공개실험의 뒷모습 1995년 파스퇴르의 사후 100년이 되던 해에 지금까지 알려졌던 모습과는 다르게 파스퇴르를 조명한 책 한 권이 출판되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과학사학자 제럴드 게이슨(Gerald Geison)이었다. 그는 그동안 많이 연구되지 않았던 파스퇴르의 개인 실험일지를 바탕으로 파스퇴르의 실제 연구 활동을 복원해 냈다. 게이슨의 연구는 푸이 르 포르의 백신 공개 실험에 대해 그동안 알려져 있지 않던 사실 하나를 보여줬다. 바로 백신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내용이다. 공개 실험 열흘쯤 후에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서 했던 강연에서 파스퇴르는 탄저백신이 그 이전에 자신이 만든 닭콜레라 백신과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즉 병균을 42~43℃의 공기에 노출시켜 약화시키는 건조법을 사용한 것처럼 이야기한 것이다. 하지만 게이슨이 실험일지에서 찾아낸 바는 그와 달랐다. 실제로 파스퇴르 자신은 이런 건조법으로 탄저 백신을 만들어 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지만, 푸이 르 포르 실험에서 사용했던 것은 자신이 만든 백신이 아니었다. 조수였던 샤를 샹베를랑이 중크롬산 칼륨 처리를 하여 만든 백신을 사용했다. 공개실험의 압박감 속에서 파스퇴르는 실험 결과가 더 확실하게 나올 수 있는 샹베를랑의 백신을 채택했던 것이다. 파스퇴르의 조카이자 그의 조수이기도 했던 아드리언 루가 남긴 에세이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건조법으로 백신을 만들기 전까지는 중크롬산 칼륨 처리를 해서 만든 백신에 대해 출판도 하지 못하게 막았다고 한다. 파스퇴르가 백신을 만든 방법을 속이고 조수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논문조차 발표하지 못하게 막은 데는 당대의 과학자, 장 조세프 투생과의 경쟁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장 조세프 투생은 작은 미생물이 질병을 일으킨다는 점에서는 파스퇴르와 생각이 같았으나 그 원인에 대해서는 견해를 달리했다. 그는 미생물에서 나오는 독성물질이 병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여 55℃로 끓여서 미생물을 죽이는 방식으로 백신을 만들었다. 이에 비해 파스퇴르는 살아있는 미생물을 희박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즉 살아있는 미생물을 약화시키는 방법을 이용했다. 두 사람의 경쟁이 본격화된 계기는 1880년 7월, 효과적인 탄저병 백신을 만들었다는 투생의 공식 발표였다. 하지만 곧 그는 가열법이 효과적인 백신을 안정적으로 생산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점을 깨닫고, 가열법 대신 페놀로 탄저균을 약화시키는 방법으로 연구 방향을 바꿨다. 새로 만든 백신을 20마리의 양에 예방접종 시킨 후 독성 탄저균을 주입했는데, 그 결과 4마리는 죽고 16마리는 살아났다. 이 결과라면 성공적인 백신이라 부르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1880년 여름, 투생의 동료였던 불리는 파스퇴르 실험실의 조수였던 루에게 투생의 실험에서 무엇이 문제였는지 물었다. 루는 이 결과를 보고 페놀을 이용한 투생의 방법도 건조법처럼 살아있는 미생물을 약화시키는 처리법이라고 생각하여 이를 파스퇴르에게 알렸다. 사실 파스퇴르의 실험실에서도 이전부터 건조법과 함께 페놀이나 중크롬산칼륨 같은 소독용 약품이나 가솔린 가스 등으로 병균을 약화시키는 방법을 시도하고 있었으나 이를 외부에 알리지 않고 있었다. 공개하지 않은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파스퇴르는 이미 효과적인 닭콜레라 백신 제조에 건조법을 사용하여 성공하기까지 했지만, 이 방법조차 공개하지 않고 있었다. 너무나 간단하고 쉽기 때문에 경쟁자들이 따라하지 못하게 하고, 그 사이 파스퇴르의 팀은 이 방법을 사용해서 더 많은 종류의 백신을 만들어내기 위한 조치였다. 1881년 푸이 르 포르 공개 실험에서 중크롬산칼륨 처리를 한 백신을 사용했다고 공개했다면 그 전 해에 발표된 투생의 실험이 파스퇴르의 실험이 성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오해를 살 여지가 많았다. 파스퇴르가 건조법으로 백신을 생산했다는 인상을 심어주고자 했던 것은 닭콜레라 백신 연구와의 연속성을 강조해서, 탄저병 백신 발견에 대한 우선권을 확보하고 그 특허권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가 투생의 새로운 연구를 알았으면서도 계속해서 투생을 이전의 가열법과 연결시켜 비판했던 것 또한 투생과 소독용 약품 처리 백신 사이의 거리를 떨어뜨려 놓기 위해서였다. 파스퇴르는 실험실 밖에서는 세속에 무관심하면서도 애국적이고 열정적인 과학자의 모습이었지만, 실험실 안에서는 세속적인 이해관계에 예민했던 사람이었다. 오늘날까지도 그가 프랑스의 국가적 영웅으로 여겨지는 데에는 그에게 이런 두 가지 모습이 공존했기 때문이 아닐까. 글=박민아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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