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세상에서 가장 어린 과학자를 위하여

2011.02.15 00:00
1990년대 방영된 ‘천재 소년 두기’는 당시 15%를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를 끈 미드(미국 드라마)다. 고등학교를 9주 만에 마치고 10살에 프린스턴대학교를 졸업한 뒤, 의사가 되기 위해 레지던트 생활을 하는 두기 하우저(Doogie Howser)가 주인공이었다. 당시 중학생이던 나 또한 귀엽게 생긴 외모와, 재밌는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에 두기가 쓰는 컴퓨터 일기의 새로움(당시엔 컴퓨터로 일기를 쓰는 게 꽤 신선했다)에 푹 빠져 즐겨보곤 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린 의사라니, 요즘말로 ‘미친 존재감’이 아닐 수 없다.(요즘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빛이 나는 압도적인 매력을 가진 것’을 이렇게 표현하곤 한다) 최근 이와 같은 ‘미친 존재감’이 과학 분야에도 나타났다. 세상에서 가장 어린 과학자가 등장한 것이다! 주인공은 영국 데본에 있는 블랙카우톤초등학교를 다니는 8~10살의 어린이 25명. 이 어린이들이 이 지역에 사는 호박벌을 관찰하고 연구해 쓴 논문이 2010년 11월 30일자 영국 왕립학회 저널인 생물학레터에 발표된 것이다. 허구가 아닌 실제 일인데다, 천재가 아닌 일반 어린이들이 주인공이니 이거야말로 천재소년 두기보다 더 엄청난 ‘존재감’이 아닌가! 천재소년 두기를 만났던 때와 같은 설렘으로 아이들이 썼다는 호박벌 논문을 읽기 시작했다. 제목은 ‘Blackawton bees’. 음…, 제목부터 괜스레 멋져 보인다! 2010년 12월 22일, 생물학 레터 온라인에 등재되었다고 쓰여 있다. 분명 제대로 실린 게 맞긴 맞았다. 저자를 보니, 맨 처음 블랙카우톤 초등학교 이름을 시작으로 25명의 이름이 알파벳 순서대로 죽~ 적혀 있다. 맨 뒤에는 교장인 데이비드 스트루드윅과,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의 신경과학자인 뷰 로토 이름이 공저자로 올라 있다. 바로 이들이 'I-scientist’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이 프로젝트를 이끈 어른들이란다. 이쯤에서 문득 밀려드는 생각 하나. ‘혹시 이 어른들이 아이들 대신 논문을 대부분 다 써 준 거 아냐?’ 처음의 설렘은 사라지고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논문을 좀 더 읽어 봐야 했다. 논문 시작에 쓰여 있는 ‘Background'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뷰 로토는 이 글에서 블랙와톤 초등학교 교장과 자신이 이러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었지만, 자신은 이 연구를 위해 벌을 훈련하고 아이들의 말을 텍스트로 기록한 것밖에 없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질문을 하고, 가설을 세우고, 게임 즉 실험을 고안한 것은 모두 아이들이 했다는 것이다. 색연필로 표를 그리고 쓴 것도 아이들이 직접 했단다. 이번엔 의심병 대신 호기심에 뒷장을 넘겨 보았다. 실제로 아이들이 그린 표와 그림이 곳곳에 실려 있다. 뷰 로토는 이전의 문헌이나 참고서적 없이 논문을 쓰는 건 도전이었다고도 써 놓았다. 어떤 연구에서건 당연히 이전 자료를 파악해야 하지만, 8~10살 아이들의 능력으론 관련 정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건 불가능했단다. 하지만 진정한 과학 연구의 동기는 호기심이며, 아이들은 과학문헌이 아니라 스스로 세상을 관찰하면서 고무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까지 읽고 맨 뒷장을 넘겨 보니, 논문에 필수 코스처럼 줄줄이 달려 있는 참고 문헌 목록이 정말 하나도 없다! 피어리뷰(peer review) 과정을 거쳐 정식으로 등재된 논문에 참고문헌이 없다니! 그렇다면 아이들은 어떤 실험 결과를 얻었기에 참고문헌 하나 없이 그 연구결과로 인정을 받은 것일까? 아이들은 여러 가지 색깔의 조명 상자(light box) 안에 벌의 먹이를 넣어 놓고, 조명 상자의 배열을 달리해 가며 꿀벌의 행동을 관찰했다. 그 결과, 어떤 벌은 먹이를 찾을 때 익숙한 색깔 패턴을 기초로 꽃을 고르고, 다른 벌들은 위치를 근거로 고른다는 걸 알아냈다. 비슷한 색깔의 꽃이 다르게 배열되어 있을 때는 전에 배웠던 색깔 패턴을 이용해 꽃을 찾는다는 것도 발견했다. 벌이 먹이가 들어 있는 꽃을 찾기 위해 복잡한 환경에서도 색깔과 위치를 모두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 낸 것이다. 왕립학회는 그 동안 곤충의 색깔과 패턴의 시각 연구가 미진했다며, 이번 연구결과가 벌의 행동연구에 가치 있는 기여를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사실 내 눈길을 잡아끈 건 연구결과 다음에 이어진 내용이었다. ‘…이 실험을 하기 전 우리는 벌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았고, 벌이 얼마나 똑똑한지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또한 벌이 없으면 우리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벌이 꽃을 살아가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벌을 훈련시키는 게 얼마나 재밌는지 깨달았다. 또한 당신이 매일 벌을 훈련시키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일은 멋지다. 우리는 벌을 좋아한다. 과학은 전에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당신이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멋지고 재밌다.’ 초등학생들의 말투와 생각이 느껴졌고, 이쯤에서 나의 의심도 말끔히 사라졌다. 물론 이 프로젝트는 블랙와톤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과, 신경과학자가 없었다면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뷰 로토가 밝혔듯이, 과학으로 신나게 놀다가 그 안에서 규칙을 발견한 건 바로 25명의 아이들이었다. 어른들은 그저 아이들이 신나게 놀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준 게 다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천재소년 두기보다 더 멋진, 세상에서 가장 어린 과학자가 나오지 말란 법은 없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 어떤 장을 벌여 놓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학원 스케줄과 학습지로 빼곡한 좁은 방안에서라면 과학이 얼마나 멋지고 즐거운 일인지 결코 알 수 없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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