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체 사냥 나선 물리학자

2011.01.04 00:00
“초고체(supersolid)가 다이아몬드보다도 단단한 고체냐고 물어보는 분들도 있더군요.” 초고체 연구로 최근 국내외에서 주목받고 있는 KAIST 물리학과 김은성 교수(39세)는 연구실을 찾은 기자가 “초고체라는 이름이 잘못 붙여진 것 같다”고 말하자 사실 좀 문제가 있다고 대답했다. ‘초유체(superfluid)’와 ‘고체(solid)’를 합친 조어인데 가운데 유체(fluid)가 빠지다 보니 ‘초’가 ‘고체’를 꾸민 꼴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초유체란 액체가 절대영도(0K(켈빈)=-273.15℃)에 가까운 극저온에서 점성이 사라지면서 마술처럼 벽을 타고 위로 흐르거나 사방으로 흩어지는 특성을 지닌 물질이다. 초고체는 고체의 일부가 초유체가 된 상태로 고체헬륨을 극저온인 0.2K 아래로 냉각시킬 때 나타난다. 김 교수는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 물리학과 박사과정 시절인 2004년 처음 초고체의 존재를 밝힌 논문을 과학저널 ‘네이처’에 발표한 주인공이다. 그런데 초유체와는 달리 초고체의 모습은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 초고체 현상, 발견과 논란 “고체란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가 제자리에 고정된 상태인데 이 가운데 일부가 점성도 없이 흐른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죠.” 사실 김 교수도 초고체를 맨눈으로 직접 본 건 아니다. 대신 ‘비틀림 진동자’라는 장치를 이용한 교묘한 실험으로 초고체의 개념을 끌어들이지 않으면 해석할 수 없는 결과를 얻어낸 것이다. 생수병 뚜껑만한 작은 금속용기(비틀림 진동자)에 액체헬륨을 넣고 압력을 높여주면 고체헬륨이 된다. 김 교수는 비틀림 진동자를 진동시키고 서서히 온도를 낮추며 진동주기를 측정했다. 그러자 절대영도에서 불과 0.2도 높은 극저온까지 내려간 순간 진동주기가 짧아졌다. 이는 진동자의 고체헬륨원자 일부가 사라져 무게가 가벼워져야 나타날 수 있는 결과다. “물론 헬륨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일부(약 1%)가 초유체가 돼 고체의 구속에서 벗어나면서 이런 효과를 낸 것이죠.” 김 교수와 당시 지도교수인 모제스 챈 교수는 초고체 현상의 원인을 기존의 초물질(초유체와 초전도체)과 같은 ‘ 보즈-아인슈타인 응축(BEC) ’이 나타난 결과라고 해석했다. 그 뒤 전 세계 10여개 실험실에서 김 교수의 실험을 재현했고 그 결과 초고체의 존재가 받아들여지는 듯 했다. 하지만 몇몇 물리학자들이 초고체 같은 괴상한 실체를 끌어들이지 않고도 김 교수의 실험을 설명할 수 있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런 주장을 가장 강하게 펴는 물리학자는 챈 교수의 스승인 미국 코넬대 물리학과 존 레피 교수다. 1970년대 비틀림 진동자를 발명한 레피 교수는 1980년대 이를 이용해 초고체의 존재를 밝히는 실험을 했지만 실패했다. 2004년 73세로 명예교수 자리도 내놓고 막 은퇴하려던 그는 제자의 논문을 보고 다시 열정이 타올랐다. 올해 6월 권위있는 물리학저널인 ‘피지컬리뷰레터스(PRL)’에 낸 논문에서는 온도를 낮출 때 진동주기가 짧아지는 원인을 고체헬륨의 탄성변화로 설명해 주목받았다. 그런데 과학저널 ‘사이언스’ 2010년 12월 10일자에 레피 교수의 주장을 무력화시킨 논문이 실렸다. 챈 교수의 제자인 김 교수팀의 연구결과다. “이 실험은 일본 이화학연구소(이하 리켄)에 있는 장비를 쓸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며칠 뒤 리켄에 가는데 관심이 있으시면….” 12월 12일 기자는 김 교수와 인천공항에서 재회했다. ● 초고체를 증명한 결정적인 실험 “중국속담에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남(藍)이고 김은성 교수가 청(靑)이죠. 허허!”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12월 13일 아침 일본 와코에 위치한 리켄의 저온물리연구실에는 김 교수의 스승인 챈 교수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김 교수팀의 이번 연구결과에 감명을 받아 공동연구를 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온 것. 옆에는 저온물리연구실을 이끌고 있는 코노 키미토시 박사와 현재 김 교수와 협력중인 일본 게이오대 물리학과 시라하마 게이야 교수도 있다. “아이디어는 간단합니다. 비틀림 진동자를 진동시킬 때 동시에 장치 자체를 천천히 회전시키는 것이죠. 장치가 회전해도 고체헬륨의 탄성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에 레피 교수의 주장이 맞다면 온도를 낮출 때 진동주기가 짧아지는 현상은 변화가 없어야 합니다.” 레피 교수의 주장과는 달리 고체헬륨의 탄성과 진동주기는 별 관련이 없었다. “1초에 한 바퀴 정도 속도로 진동자를 돌리는 게 뭐 그리 어렵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초저온에서 이게 가능한 장치는 전 세계에 3대밖에 없습니다. 그 중 하나가 여기 있습니다!” ‘크리오스텟(cryostat)’이란 이름의 이 장치는 내부에 진동자와 진동속도 측정기 등 각종 장치를 포함한 냉각 시스템으로 드럼통 자체가 돌아간다고. 절대영도에 가까운 극저온 실험이기 때문에 1초에 한 바퀴 정도인 비교적 느린 회전조차도 정교하게 조절되지 않으면 측정을 교란시킨다. “김 교수에게서 공동연구를 제안받고 초고체의 연구현황을 살펴보니 무척 흥미롭더군요. 그래서 같이 해보기로 했죠.” 김 교수는 박사후연구원으로 있는 최형순 박사를 리켄에 파견했고 코노 박사팀에서도 연구원 한명이 참여해 8개월에 걸쳐 실험을 진행했다. “사실 초고체 현상은 아직까지 이론으로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 가설을 세우고 이를 입증하는 실험을 계속해 나가야지요.” 김 교수의 말에 챈 교수는 스승답게 멋진 멘트를 날렸다. “몇몇 사람들은 초고체가 (이론의 관점에서) ‘지저분하다(messy)’고 말하지만 저는 오히려 ‘풍부하다(rich)’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리학의 다양한 측면을 늘 고려해야 하니까요.”
보즈-아인슈타인 응축 보즈-아인슈타인 응축은 1920년대 인도의 물리학자인 사티엔드라 보즈와 아인슈타인이 함께 연구해 예측한 물질의 상태다. 이에 따르면 보존이라는 입자들은 극저온에서 가장 안정한 상태가 돼 서로 겹쳐지면서 개별 입자가 파동처럼 한꺼번에 움직인다. 이런 상태가 BEC다. 초유체는 보존인 액체헬륨이 BEC가 돼 점성이 사라진 결과고, 초전도체는 보존인 전자쌍이 BEC가 되면서 전기저항이 사라진 결과다. 초전도체 전자쌍의 BEC는 1972년, 기체의 BEC는 2001년, 3He(원자핵이 양성자 둘, 중성자 하나로 이뤄진 동위원소)쌍의 BEC는 1996년, 2003년 각각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초고체가 사실로 확인된다면 액체, 기체에 이어 고체에서도 BEC 현상이 발견된 것이다. 2004년 논문에 물리학계가 흥분하고 초고체 발견이 유력한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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