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고체’ 한국과학자가 존재 증명했다

2010.12.24 00:00
《“순자(荀子) 권학편에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남(藍)이고 김은성 교수가 청(靑)이죠. 허허!”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이달 13일 아침 일본 도쿄에서 북쪽으로 차를 타고 1시간가량 달려 와코 시에 도착했다. 와코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구 기관인 이화학연구소(理硏·리켄)가 있다. 리켄 저온물리연구실에는 김은성 KAIST 물리학과 교수(39)의 스승인 모지스 챈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물리학과 교수(64)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기발한 실험으로 초고체의 존재를 증명한 김 교수팀의 연구 결과(논문은 과학저널 ‘사이언스’ 이달 10일자에 실림)에 감명을 받아 공동연구를 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온 것이다.》 ● 스승의 스승이 반대해 김 교수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물리학과 박사과정 시절인 2004년 지도교수였던 챈 교수와 초고체의 존재를 시사하는 실험 결과를 과학저널 ‘네이처’에 발표해 물리학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현재 초고체 연구는 노벨물리학상의 차기 수상 분야로 꼽힌다. 액체헬륨의 초유체 연구는 1962년과 1978, 1996, 2003년 노벨물리학상으로 이어졌다. 김 교수는 생수병 뚜껑만 한 ‘비틀림 진동자’에 액체헬륨을 넣고 압력을 높여 고체로 만든 뒤 시계방향으로 잠깐 돌다 시계 반대방향으로 도는 ‘진동운동’을 시켰다. 그는 “온도를 낮추면서 진동속도를 측정했는데 어느 순간 진동속도가 빨라졌다”며 “이런 현상은 진동자의 무게가 가벼워져야만 나타날 수 있고 따라서 고체헬륨 가운데 일부가 초유체가 돼 진동자와 따로 노는 초고체가 생겼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그 뒤 전 세계 실험실 10여 곳에서 김 교수의 실험을 재현했고 초고체의 존재가 받아들여지는 듯했다. 하지만 몇몇 물리학자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초고체 같은 괴상한 실체를 끌어들이지 않고도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반대 주장을 가장 강하게 펴는 물리학자는 챈 교수의 스승인 존 레피 미국 코넬대 물리학과 교수(79)다. 1970년대 비틀림 진동자를 발명한 주인공인 레피 교수는 1980년대 이를 이용해 초고체의 존재를 밝히는 실험을 했지만 실패했다. 2004년 명예교수 자리도 내놓고 막 은퇴를 하려던 그는 제자팀의 논문을 보고 다시 열정이 불타올랐다. 그는 현재까지 홀로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올해 6월 권위 있는 물리학저널인 ‘피지컬리뷰레터스’에 낸 논문에서는 온도를 낮출 때 진동속도가 빨라지는 원인을 고체헬륨의 탄성 변화로 설명해 주목받았다. 고체헬륨은 묵처럼 탄성이 있어 진동운동에 저항한다. 만일 온도를 더 낮추면 탄성이 줄어 단단해지면서 저항이 줄어들어 진동속도가 빨라진다는 것. 그런데 이번에 김 교수팀이 레피 교수의 주장을 무력화시킨 연구 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 일본 리켄의 첨단장비로 실험 “아이디어는 간단합니다. 비틀림 진동자를 진동시킬 때 동시에 장치 자체를 천천히 회전시키는 것이죠. 장치가 회전해도 고체헬륨의 탄성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에 레피 교수의 주장이 맞는다면 이전과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초고체 때문이라면 진동자의 느린 회전조차 고체헬륨 내부에 소용돌이를 일으켜 초유체가 생기는 걸 방해할 것이다. 그 결과 온도를 낮출 때 진동속도가 빨라지는 정도가 약해져야 한다. 실험 결과는 김 교수의 손을 들어줬다. 리켄에는 전 세계에 3대밖에 없다는, 극저온에서 진동자를 회전시킬 수 있는 장비가 있다. 김 교수가 리켄 저온물리연구실 고노 기미토시 박사팀과 공동연구를 하게 된 이유다. “사실 초고체 현상은 아직까지 이론으로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 가설을 세우고 이를 입증하는 실험을 계속해 나가야지요.” 김 교수의 말에 챈 교수는 스승답게 멋진 논평을 했다. “몇몇 사람은 초고체가 (이론의 관점에서) ‘지저분하다(messy)’고 말하지만 저는 오히려 ‘풍부하다(rich)’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리학의 다양한 측면을 늘 고려해야 하니까요.” 한편 과학동아 2011년 1월호는 특집기사로 초고체를 비롯해 다강체, 모노폴 등 최근 주목받고 있는 ‘수상한’ 물질을 소개한다. 와코=강석기 동아사이언스 기자 sukki@donga.com ::초유체(superfluid):: 절대영도(온도의 최저점인 섭씨 영하 273.15도)에 가까운 극저온에서 점성이 사라지면서 마술처럼 벽을 타고 위로 흐르거나 사방으로 흩어지는 특성을 지닌 물질이다. 초유체 현상은 1937년 액체헬륨에서 처음 관찰됐다. ::초고체(supersolid):: 고체헬륨이 절대영도보다 불과 0.2도 높은 극저온으로 냉각될 때 그 일부가 초유체로 존재하는 상태. 1960년대 말 초고체의 존재가 이론적으로 예측된 뒤 많은 물리학자들이 그 존재를 입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메일로 더 많은 기사를 받아보세요!

이 기사 어떠셨어요?

댓글 0

작성하기

    의견쓰기 폼
    0/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