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이그 벤터, 생명과학계의 진정한 이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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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가천의대 이길여 암·당뇨연구원 김성진 원장을 만났다. 김 원장은 지난해 한국인 최초로 자신의 개인 게놈을 해독, 공개해 화제가 된 인물이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김 원장이 요즘 크레이크 벤터의 자서전을 읽고 있다며 기자에게도 시간이 있으면 꼭 읽어보라고 권했다. 그 뒤 회사로 돌아와 책장을 훑어보니 벤터의 자서전 ‘게놈의 기적’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자서전을 보기 전까지 기자는 벤터가 다소 야비한 사람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셀레라 게노믹스란 회사를 만들어 인류의 자산인 인간염기서열을 특허대상으로 하고 인간게놈초안을 먼저 만들겠다고 인간게놈프로젝트 컨소시엄이 공개한 데이터를 이용하는 등 공정한 경쟁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자서전을 보니 오히려 비겁했던 사람들은 컨소시엄 측이 아니었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벤터가 개척한 혁신적인 실험방법들이 인간게놈해독을 앞당겼을 뿐 아니라 비용절감에도 큰 역할을 했음은 분명한 사실임을 깨달았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건 벤터의 삶의 여정이었다. 1946년생인 벤터는 어린 시절 개구쟁이였고 사춘기가 지나서는 통제 불능의 삶을 살았다. 결국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벤터는 월남전에 참전하는데 3년 동안 생사를 넘나든 경험은 그가 삶을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됐다. 고교 성적이 워낙 안 좋았던 벤터는 제대한 뒤 전문대를 거쳐 일반대학에 편입했고 1975년 캘리포니아대(샌디에이고)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우등생으로 곱게 자라 탄탄대로로 학위를 받은 많은 연구자들과는 달리 벤터의 이런 인생역경은 기존 방법에 안주하지 않고 늘 새로운 시도를 하는 개척자의 태도로 이어졌다. 벤터는 미국 국립보건원(NIH)에 있으면서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발현서열꼬리표(EST) 방식을 개발해 유전자를 대량 발견하는 길을 열었다. EST는 유전자가 발현된 mRNA를 주형으로 역전사를 시켜 cDNA를 만든 뒤 그 서열을 분석해 유전자를 밝히는 방법이다. 그 뒤 우여곡절을 거쳐 인간게놈을 분석하는 경쟁에 뛰어들었는데 이때 개발한 방식이 바로 산탄총 염기서열 분석법(shotgun sequencing)이다. 게놈을 마구잡이로 조각낸 뒤 염기서열을 분석하고 그 데이터를 컴퓨터가 재구성해 게놈 전체의 염기서열을 알아내는 산탄총 염기서열 분석법은 일종의 거대한 조각퍼즐(무려 2600만 개!)이다. 반면 인간게놈프로젝트 컨소시엄의 경우 게놈의 지도를 그려놓고 하나하나 염기서열을 분석해가는 방식이었다. 안 될 거란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벤터는 산탄총 염기서열 분석법으로 인간게놈을 분석했고 그 뒤 이 방법은 게놈 연구에 널리 쓰이게 됐다. 한편 벤터는 2007년 자신의 개인 게놈을 분석해 공개했다. 세계 최초로 밝혀진 개인 게놈이었다. 현재 벤터는 비영리연구소인 J. 크레이그 벤터 연구소를 차려 합성생물학 연구에 열정을 불사르고 있다. 지난해부터 우리나라도 인간게놈 연구결과들이 본격적으로 나오고 있다. 그런데 누가 최초로 한국인 게놈을 해독했느냐를 두고 말도 많았고 상대를 비난하는 목소리도 컸다. 제로에서 출발해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게놈해독에 성공한 벤터의 입장에서는 자신 같은 선구자들이 확립해 놓은 연구방법으로 사실상 ‘시간과 돈’만 있으면 결과를 낼 수 있는 환경에서 내가 먼저니 네가 먼저니 하는 모습이 어떻게 비칠까. 우리나라에서도 벤터처럼 진정 혁신적인 과학자가 나타나 세계의 주목을 받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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