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도지슨,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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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개봉된 팀 버튼 감독의 3D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인기다. 이번 영화에서 앨리스는 아이가 아니라 19살의 처녀이고 스토리도 원작에서 영감을 얻었을 뿐 전혀 새로운 내용이다. 그럼에도 영화 속에는 소설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광경이 멋지게 형상화돼 있다. 원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1865년에, 그 속편인 ‘거울나라의 앨리스’는 1871년에 각각 출간됐다. ‘앨리스’의 작가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은 당시 옥스퍼드대 크라이스트처치의 목사이자 수학자였던 찰스 도지슨(Charles Dodgson)의 필명이다. 1832년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도지슨은 1849년 옥스퍼드대 크라이스트처치에 입학해 신학과 수학을 공부한 뒤 모교에서 목사와 수학교수로 봉직했다. 그는 180cm 정도의 훤칠한 키에 날렵한 몸매로 나름 매력있는 외모였지만 1898년 66세로 사망할 때까지 독신으로 지냈고 평생 이렇다 할 연애사건 한 번 없었다고 알려져 있다. 소심한 성격이 가장 큰 원인으로 보이는데 사교모임에서도 말 한마디 않고 뒤에 가만히 앉아있고는 했다. 그 역시 자신의 삶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의 인생은 정말 이상할 정도로 모든 시련과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나의 행복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어떤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나에게 주어진 재능 중의 하나라고 확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도지슨이 목사나 수학자로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했다. 그의 강의는 무척 지루했고 논리학 분야에서 몇몇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제시했을 뿐 수학의 발전에 기여한 바도 없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우연한 기회에 판타지 문학의 영원한 고전이 된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씀으로써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지울 수 없는 환상을 심어놓았고 그 자신 역시 문학사에 이름을 남겼다. 이 모든 건 그의 삶을 사로잡은 한 소녀와의 우연한 만남의 결과였다. ●아이의 부탁으로 소설 집필 1856년, 당시 막 소개되기 시작한 사진에 관심이 많았던 24세 청년 도지슨은 대성당을 찍으러 갔다가 크라이스트처치의 학장으로 막 부임한 헨리 리델의 가족을 만났다. 그 뒤 그는 리델의 집을 뻔질나게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 집에는 여자아이가 셋 있었는데 그는 아이들과 노는 걸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인형극과 마술을 배웠고 여러 가지 게임과 퍼즐을 개발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건 도지슨은 오로지 여자아이들만 좋아했다는 점이다. 리델 학장의 딸들 가운데 둘째인 앨리스 리델(Alice Liddell)이 특히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그는 앨리스의 사진을 여럿 남겼다. 위의 사진은 그 가운데 하나로 도지슨이 직접 찍은 1858년 앨리스 리델이 6살 때 모습이다. 앨리스 리델은 그의 삶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앨리스 리델이 결혼할 때 그는 편지에서 “당신 이후로 저에게는 꽤 많은 어린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당신과 같지는 않았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1862년 그가 30세, 앨리그가 10살이던 여름 어느 날 도지슨은 리델가의 세자매를 데리고 템즈강으로 소풍을 떠났는데 이때 그는 노를 저으며 즉석에서 동화를 지어 아이들에게 들려줬다. 소녀가 토끼 굴속으로 들어가 땅 속 나라에서 겪게 되는 에피소드였다. 그런데 그 뒤 앨리스가 그 이야기를 책으로 써달라고 그를 조르기 시작했다. 앨리스 리델은 “내가 어찌나 끈덕지게 졸라댔는지, 그는 한번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하더니, 결국에는 마지못해 글로 써보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회상했고 도지슨 역시 한 글에서 “나는 단지 사랑하는 한 아이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책을 엮었고, 내 조잡한 솜씨로 그림을 그렸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듬해 그는 앨리스 리델에게 책 ‘땅 속 나라의 앨리스(Alice's Adventures Under Ground)’를 건네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는 스토리를 다듬어 출판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도지슨은 어릴 때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20대에 시나 단편을 잡지에 기고하기 시작했는데 주로 유머나 풍자가 깔려있는 그렇고 그런 읽을거리였다. 그 자신 당시의 작품을 두고 “난 아직 출판할 만한 가치있는 작품을 썼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평가한 바 있다. 루이스 케럴이란 필명은 1856년부터 쓰기 시작했다. 1865년 존 테니얼의 삽화가 곁들여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가 출판됐고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 뒤 1871년 속편인 ‘거울나라의 앨리스(Through the Looking-Glass)’가 출판됐다. ‘앨리스’가 나온지 100년도 더 지난 오늘날 이 책들을 읽어보면 이 작품들이 당시 왜 그렇게 반향을 불러일으켰는지 공감하기가 어렵다. 글 곳곳에 당시 영국사람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었던 비유와 표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재 나와 있는 ‘앨리스’들은 원문을 많이 뜯어고쳐 읽기 쉽게 만들어놓은 버전이다. 그럼에도 정본 ‘앨리스’가 살아남아 여전히 ‘명성’을 날리고 있는 건 일부 어른들이 여전히 ‘앨리스’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저명한 과학저술가이자 수학자인 마틴 가드너는 1960년 ‘주석달린 앨리스’를 집필했고 40년이 지난 2000년 ‘주석달린 앨리스’ 결정판을 내놓았다(한글판은 ‘앨리스’란 제목으로 2005년 나왔다). 본문보다 주석이 훨씬 긴 이 책에서 가드너는 “‘앨리스’가 불멸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오직 어른들-특히 과학자와 수학자들-이 계속해서 이 책을 즐기기 때문이며, 이 책의 주석은 바로 그런 어른들을 위한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과연 ‘앨리스’의 어떤 부분들이 과학자들의 ‘영감’을 자극하는 걸까. ●진화의 아이콘 ‘붉은 여왕’ ‘앨리스’를 읽다보면 곳곳에 저자가 수학자임을 알 수 있는 표현들이 나온다. 지면 관계상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9장에 나오는 한 장면만 소개한다. “하루에 몇 시간이나 수업을 받았니?” 이야기 주제를 바꾸려고 앨리스는 급히 물었다. “첫날은 열 시간, 다음 날은 아홉 시간, 대충 그랬어.” 가짜 거북이 대답했다. “참 이상한 시간표네!” 앨리스가 말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줄어드니까(lessen) 수업(lesson)이지.” 그리폰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게 수업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앨리스는 곰곰이 생각을 해본 후에 말했다. “그럼 열한 번째 날은 휴일이겠네?” “그야 당연하지.” 가짜 거북이 말했다. “그럼 열두 번째 날은 어떻게 지내지?” 앨리스는 너무나 궁금했다. 하지만 그리폰이 단호하게 나섰다. “수업 이야기는 이 정도로 충분해.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해주도록 해.” 앨리스가 ‘곰곰이 생각을 해본 후에’ 열한 번째 날이 휴일인 걸 맞춘 건 수업시간이 하루에 한 시간씩 줄어드는 등차수열이란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a1=10 an+1=an-1 (n=1. 2. 3, …) a11=0 a12=? 열두 번째 날이 궁금한 건 공식에 따르면 수업을 ‘-1시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앨리스의 날카로운 질문에 당황한 그리폰(독수리 날개와 머리에 사자 몸뚱이를 한 괴물)이 얼른 이야기 주제를 돌리는 이유다. 이런 재미는 ‘주석달린 앨리스’를 읽지 않는 한 알아차리기 어렵다. 사실 ‘앨리스’의 영향력은 과학 분야에서 오히려 다채롭다. 물론 이 경우는 저자조차 깨닫지 못한 의미를 ‘앨리스’ 매니아인 과학자들이 ‘발견’한 것들이다. 속편인 ‘거울나라의 앨리스’가 특히 많은 영감을 줬다. ‘거울나라 앨리스’는 어느 겨울날 앨리스가 새끼 고양이 키티와 장난을 치다가 거울 속으로 들어가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거울 속에 들어가기 직전 앨리스가 키티에게 하는 말이다. “거울 속의 집에서 살면 어떨 것 같아, 키티? 저기에서도 너에게 우유를 줄까? 어쩌면 거울 속의 우유는 먹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몰라.” 오른손을 거울에 비추면 왼손으로 보이듯이 거울속의 우유를 확대해보면 단백질 같은 분자의 구조도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만일 이런 우유를 만든다면 실제로 먹어도 소화를 시킬 수가 없다. 단백질을 이루는 아미노산 역시 오른손과 왼손처럼 2가지 형태가 있는데 자연계에는 왼손 형태만 있다. 우리 몸이 만드는 단백질분해효소 역시 왼손 아미노산으로 이뤄진 단백질만 분해할 수 있다. 따라서 거울 속 오른손 아미노산으로 만들어진 단백질은 분해(소화)가 안 된다. 이런 특징을 지닌 분자를 광학이성질체라 부른다. 지난해 과학저널 ‘사이언스’에는 미생물이 오른손 아미노산을 만들어 주위 환경변화에 대응한다는 연구결과가 실렸는데 이를 해설하는 논문에서 앨리스가 아미노산을 들고 있는 삽화가 나온다. 한편 물리학자들은 위의 구절을 조금 다르게 해석한다. 즉 거울나라를 반물질의 세계로 보는데 물질과 반물질이 만나면 엄청난 에너지를 내고 소멸하므로 거울 속의 우유는 먹을 수 있기는커녕 큰 사고가 날 수 있다는 것.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CERN)의 대형강입자충돌기(LHC)에 설치된 검출기 가운데 하나도 이름이 앨리스(ALICE)다. ALICE는 ‘A Large Ion Collider Experiment(대형이온충돌실험)’의 약자이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앨리스’와 엮어보려는 과학자들의 기지가 돋보인다. 생물학자들도 ‘앨리스’를 그냥 두지 않았다. 팀 버튼의 이번 영화에서 립스틱을 하트 모양으로 칠해 깊은 인상을 남긴 ‘붉은 여왕’은 땅속 나라의 독재자로 나오는데 사실 ‘거울나라 앨리스’에서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다. 앨리스가 붉은 여왕과 만나 벌이는 에피소드의 한 장면이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들 주변에 있는 나무며 다른 것들의 위치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들이 아무리 빨리 달려도 어느 것 하나 뒤로 젖히고 앞으로 달려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모두 다 우리를 따라서 움직이고 있는 걸까?” 앨리스는 어리둥절해져서 생각했다. 여왕은 앨리스의 생각을 눈치챈 것 같았다. 여왕은 다시 소리쳤다. “더 빨리! 아무 말 하지 말고!” 앨리스는 왜 빨리 달려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중략) 앨리스는 깜짝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머나, 우리가 계속 이 나무 아래에 있었던 건가요? 모든 것이 아까와 똑같은 자리예요!” “당연하고말고. 어떨 거라고 생각했지?” 여왕이 물었다. “글쎄요.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한참 동안 빨리 달리면 어딘가 다른 곳에 도착하게 되거든요.” 아직도 조금 숨을 헐떡이며 앨리스가 말했다. “느림보 나라 같으니! 자, 여기에서는 보다시피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으려면 계속 달릴 수밖에 없단다. 어딘가 다른 곳에 가고 싶다면, 최소한 두 배는 더 빨리 뛰어야만 해!” 여왕이 말했다. 물리학자들은 이 장면을 아무리 빨리 달려도 빛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는 현상의 비유로 쓰지만 가장 유명한 건 미국 시카고대의 진화생물학자 리 밴 베일런이 1973년 제시한 ‘붉은 여왕 가설’이다. 해양 화석을 연구하던 그는 종의 멸종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하게 된다. 즉 어떤 종이 환경에 적응했더라도 결코 방심할 수가 없는데, 다른 종들도 그 환경에 곧 적응하기 때문이다. 그는 끊임없는 진화경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결국 뒤쳐져 멸종할 수밖에 없다는 ‘붉은 여왕 가설’을 소개한 ‘새로운 진화 법칙’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1995년 과학저술가 매트 리들리는 ‘붉은 여왕: 성과 인간 본성의 진화(Red Queen: Sex and the Evolution of Human Nature)’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이 널리 알려지면서 ‘붉은 여왕’이 더욱 유명해졌다. ‘앨리스’ 두 편 모두 앨리스가 꿈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끝난다. ‘거울나라 앨리스’의 이야기 뒤에 작가는 시 한편으로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앞 다섯 행을 시작하는 알파벳을 읽어보면 바로 ‘ALICE’가 된다. 바로 작가가 리델 세자매에게 뱃놀이에서 앨리스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이다. A boat, beneath a sunny sky Lingering onward dreamily In an evening of July- Children three that nestle near, Eager eye and willing ear, Pleased a simple tale to hear- (하략) 배 한 척, 햇빛 환한 하늘 아래로 꿈결처럼, 느릿느릿 흘러가네. 7월의 어느 저녁에. 편안하게 앉은 어린아이 세 명 초롱초롱한 눈으로 짧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네, 즐거이 (‘앨리스’, 루이스 캐럴 원작, 마틴 가드너 주석, 존 테니얼 그림, 최인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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