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존엄사 4원칙’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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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법원이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의학적으로 생명 연장이 불가능한 환자에게 인간답게 죽을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병원 측은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상고할 가능성이 높아 ‘존엄사(尊嚴死·소극적 안락사)’ 문제는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서울고법 민사9부(부장판사 이인복)는 10일 식물인간 상태인 김모(76·여) 씨와 가족들이 “김 씨에 대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해 달라”며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1심과 같이 김 씨 가족의 손을 들어줬다. 1심 재판부는 “김 씨는 고령으로 기대 생존기간이 3, 4개월에 불과해 인공호흡기 부착이 의학적으로 무의미하다”며 “김 씨가 평소 자연스러운 사망을 원한다는 의사를 표시한 바 있어 병원은 김 씨에게서 인공호흡기를 제거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세브란스병원은 “생명 경시 풍조를 방지해야 한다”며 항소했으며, 의료계에서는 법원이 존엄사의 요건에 대해 좀 더 보편적이고 명확한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의료계의 요구를 의식한 듯 1심 판결을 인정하면서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는 4가지의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내놓았다. △환자가 회생 가능성이 없을 때 △환자가 진지하고 합리적으로 치료 중단을 원할 때 △치료 내용이 사망 과정의 연장으로서 현 상태 유지에 관한 것일 때 △의사에 의한 치료 중단의 시행 등이다. 재판부는 다만 “회생 가능성 여부는 주치의뿐만 아니라 중립적인 제3의 의료기관도 판단해야 하며 환자의 고통을 완화시키는 치료나 일상적인 진료는 중단할 수 없다”며 존엄사 남용 가능성을 제한했다. 이번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되면 이 같은 요건은 연명치료 중단 여부를 결정하는 사실상의 기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 입법 과정에서도 중요한 참고사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재판부는 판결에 앞서 이례적으로 ‘당부의 말씀’을 읽으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재판부는 “이번 판결이 경사진 비탈을 굴러가듯 확대 해석돼 환자와 가족에 대한 치료 중단 강요와 압박으로 작용해선 안 된다”며 “고령화 사회에 진입해 더 나은 늙음을 준비하듯 이제 더 자연스럽고 품위 있는 죽음을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아무런 기준 없이 의사와 환자, 가족에게만 문제를 맡겨 두는 상황이 지속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사회의 견해를 폭넓게 반영해 연명 치료 중단 등에 관한 기준과 절차, 방식, 남용에 대한 처벌과 대책 등을 규정한 입법이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입법 필요성도 강조했다. 한편 김 씨 측 신현호 변호사는 “환자 가족들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연명치료를 계속 받아야 하는 현 상황에 대해 상당히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며 “빨리 모든 재판이 끝나 환자가 명예롭고 존엄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세브란스병원 측은 “항소심 판결문을 검토한 뒤 병원윤리위원회를 거쳐 최고경영자회의에서 상고 여부를 신중하게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김 씨는 지난해 2월 세브란스병원에서 폐 조직검사를 받던 중 폐 혈관이 터져 뇌가 손상된 뒤 식물인간 상태로 지내 왔다. 가족들은 지난해 5월 무의미한 연명 치료장치를 제거해 달라며 소송을 냈고 서울서부지법은 11월 사상 처음으로 존엄사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종식 동아일보기자 bell@donga.com 김상훈 동아일보 기자 corekim@donga.com 내 손안의 뉴스 동아 모바일 401 + 네이트, 매직n, ez-i ⓒ 동아일보 & dong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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