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각막 기증하고 장기기증 약속한 나성순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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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그분이 뿌린 씨앗 남편이 받았고 그 씨앗을 또 누군가가 받겠죠” 추기경 선행에 깨달음 얻어 반대하는 자녀들 설득 장기기증 돈없어도 가능 서약 하고나니 마음 홀가분

따뜻한 죽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9일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골목의 ‘영양 죽집’. 허름한 테이블 2개에 의자 4개뿐이었지만 담백한 맛을 잊지 못한 손님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곳 테이블에서 ‘죽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한 책자가 눈에 띄었다. “장기기증으로 사랑을 실천하세요.” 바로 장기기증을 홍보하는 팸플릿이었다. 여기에는 이 죽집의 사장 나성순 씨(58·여)와 석 달 전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이용산 씨의 사연뿐 아니라 고 김수환 추기경의 가르침도 녹아 있었다. 나 씨가 장기기증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8년 전 자궁근종을 떼어내는 수술을 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가 우연히 장기 기증 관련 책자를 보면서부터다. “물론 그때까지는 먼 훗날에 혹시 기회가 있으면 생각해 보자 하는 수준이었어요. 아이들에게도 그냥 그 정도로만 이야기했죠.” 그러던 어느 날 남편 이 씨가 갑작스레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심성 좋은 목수 남편이 머리가 아프다고 하니 ‘신경을 너무 많이 썼나 보다’ 했다. 2001년 찾은 병원에서 혈관 수술을 하자고 했지만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넘겼다. 하지만 2008년 서울대병원에서 충격적인 결과를 들어야 했다. “뇌혈관이 손상돼 어려운 지경입니다.” 병원을 옮겨도 한결같이 힘들다는 대답이었다. 남편이 아프기 시작한 뒤로 장기기증을 현실의 문제로 고민하기 시작했고 지난해 2월 추기경의 선종과 각막 기증소식을 접하며 마음을 굳힌 나 씨는 바로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 연락을 했다. “한창 병간호로 마음이 지쳐 있을 때 김 추기경님의 선행과 관련한 뉴스를 보며 ‘아,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구나’ 하고 무릎을 쳤거든요. 넉넉지 않은 형편 때문에 기부를 할 여력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장기 기증은 돈에 구애받는 게 아니잖아요. 또 남편이 누군가에게 새 세상을 선사하게 되는 것이고요. 두려워하거나 꺼릴 이유가 없었죠.” 하지만 자식들은 달갑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지난해 11월 남편이 세상을 뜨자 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기증센터에서 연락이 오느냐”며 짜증을 내기도 했다. 나 씨는 이런 자식들에게 김 추기경의 이야기를 하며 설득했다. “아빠도 추기경님처럼 어려운 사람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기증하면 어떻겠니? 아빠가 좋은 일 하고 가시게 해드리자.” 결국 자녀들은 마음을 바꿨다. 화장장에서 한줌의 재로 변한 남편을 품에 안고 서울로 올라오던 날, 착잡했지만 남편 덕분에 2명의 40대 남자가 세상을 향한 ‘눈’을 얻었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됐다. “딸도 그날 말하더라고요. 아빠 눈을 얻은 사람들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한 달 전에는 나 씨도 장기기증 서약을 했다. “서약까지 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홀가분하고 좋네요.” 나 씨는 가게에도 장기기증 관련 책자를 갖다 뒀다. 손님을 붙잡고 설명을 해주기도 한다. “가게가 작아 더 많은 손님에게 못 보여주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죠. 추기경님이 뿌린 씨앗을 우리 남편이 받아 누군가에게 줬다고 생각해요. 그 씨앗이 또 누군가에게 전달됐으면 하는 마음이고요.” 장윤정 동아일보 기자 yunjung@donga.com ▼ ‘김수환 효과’ 작년 기증 서약자 2.4배 늘어 각막 적출 주천기 교수 “그분 선물에 인생관 바꿔 나눔실천” ▼ 고 김수환 추기경의 각막 적출 수술을 집도했던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안센터장 주천기 교수(54)는 11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추기경님이 선종하셨던 지난해 2월 16일을 한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다”며 “추기경님의 사랑이 담긴 유묵 글귀를 매일 동료 의사들이 가슴 속에 새기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 이 병원 로비에는 “눈은 마음의 등불”이라는 김 추기경의 유묵이 걸려 있다. 이 유묵은 1986년 서울 서초구 방배동성당 신축 기금 마련을 위한 바자에 내놓기 위해 김 추기경이 손수 쓴 작품이다. 당시 김 추기경의 주치의였던 김재호 명동안과병원장이 구매해 서울성모병원 재직 당시 외래진료실에 걸어두었다가 지난해 4월 14일 기증한 것이다. 주 교수는 “추기경님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선물(각막)을 제 손으로 전달했던 순간부터 인생관이 변했고, 연구와 수술에만 몰두했던 삶을 돌아보고 나눔의 정신을 본받으려 아프리카 케냐에 봉사활동을 다녀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해 김 추기경 선종으로 장기기증 서약자 수가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11일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 따르면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지난해 전국에서 장기를 기증하겠다고 서약한 사람의 수는 14만886명으로 2008년 5만9741명의 2.4배로 늘어났다. 특히 지난해 2월 김수환 추기경의 각막이 이식된 뒤부터 3월 1만5389명, 4월 1만8521명, 5월 3만 1200명이 장기기증을 서약하는 등 급증했다. 이에 따라 국내 장기기증 희망등록자는 지난해 말 기준 총 59만3000여 명으로 10년 전보다 12배로 늘었다. 장기기증 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는 “김수환 추기경의 각막 기증이 국내 장기기증문화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조종엽 동아일보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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