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사 ‘미란다 원칙’ 도입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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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기 환자에게 연명치료의 선택권을 주는 ‘의학적 미란다 원칙’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대법원에서 세브란스병원 김옥경 할머니의 존엄사 법리를 검토했던 노태헌 재판연구관(43·사진)은 9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피의자에게 권리를 고지해 주는 미란다 원칙처럼 말기 환자에게도 진료 현장에서 연명 치료 여부를 알려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의 출신 판사인 노 연구관은 존엄사 논쟁이 불붙던 올해 2월부터 입법 연구와 사례 수집을 위해 일주일에 평균 두 번 정도는 밤을 새우면서 연구에 매달렸다. 다른 나라 법례를 찾기 위해 대법원 재판연구원에 파견 온 영미법, 독일법 교수들을 수시로 만났다. 연구실에는 그가 모은 기초 자료만 책상에서 천장까지 닿을 정도다. “이번 판결을 ‘존엄사’ 판결로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인공호흡에 의한 ‘연명치료의 중단’을 다룬 판례이지 존엄사(사망)를 다룬 판결이 아닙니다. 국내법상 사람의 죽을 권리는 인정되지 않습니다. 결과에 초점을 맞춘 존엄사라는 용어를 사용하다 보니 ‘여전히 할머니가 살아 있는데 웬 존엄사냐’라는 얘기가 나오는 겁니다.” 노 연구관은 “존엄사, 안락사 등 연명치료와 연관된 용어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거쳐 명확한 개념을 먼저 정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존엄사가 주로 사용되기 전에는 안락사라는 단어가 많이 쓰였다. 외국에서는 적극적인 안락사를 말할 때 존엄사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것들이 세분되면서 의사조력사, 자연사 등의 단어가 쏟아졌다. 노 연구관은 10일 한국보건의료연구원에서 열리는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 공개토론회에서 용어 정립 문제를 제기할 예정이다. 그는 ‘대법원이 할머니가 사망 임박 단계가 아닌데도 호흡기를 떼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 아니냐’는 일각의 지적에 대해 “판결문의 취지를 잘못 이해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노 연구관은 “세브란스병원이 대법원에 상고한 내용은 식물인간, 뇌사 등 단계별로 연명치료 중단의 명확한 기준을 제시해 달라는 것이었다”며 “대법원은 이에 대해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기초해 연명치료 중단의 허용 범위, 환자의 추정적 의사의 인정 요건 등 법리적 판단을 내린 것”이라고 말했다. 노 연구관은 1996년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전문의를 취득하고 이듬해 사법고시에 응시해 합격했다. 의대생 시절 의사와 환자 간 의료분쟁을 수없이 목격한 그는 법률적 판단을 통해 이런 갈등을 줄여 나가고 싶었다고 했다. 노 연구관은 최근 서울대병원이 발표한 연명치료 가이드라인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가이드라인을 보면 가족이 환자를 대리해 사전의료지시서에 서명할 수 있다는 표현이 있는데 법률상 법정대리인 및 본인이 선임한 임의대리인은 있지만 가족이 바로 대리할 수 있는 제도는 마련되지 않았다”며 “법제화가 안 된 상황에서 가족이 환자를 대리해 의사 표시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 연구관은 “무의미한 연명 치료 논란은 이미 다른 나라에서는 1970년대부터 시작됐다”며 “병원에서 개별적으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나가더라도 궁극적으로는 병원을 포괄해 사회적인 합의를 이끌어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한편 김 할머니는 인공호흡기를 뗀 지 17일째인 9일 현재 호흡수, 산소포화도, 혈압 등이 정상 수치를 유지하고 있다. 이진한 동아일보 기자·의사 liked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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